그러나 중국 시골마을 즉 향, 촌에 ‘신’(新)자가 들어 가 있거나 ‘흥’(興), 락(樂), 복(福,㚆), 홍(紅), 인명 등이 들어가 있으면 십중팔구 ‘신중국’(新中國,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신흥촌은 전형적이 최근 지명인 셈이다. 현지의 기록을 보면 흑웅동은 지금의 왕청현 대감자촌의 서북쪽에 위치했으며, 정확하게는 ‘대감자 서북쪽 2리 되는 곳’ 즉 서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곳엔 마을이 하나밖에 없고 들판도 제법 있는 한편, 무엇보다 수전(논)이
북로군정서가 그랬듯이 필자도 북로군정서의 이동로를 따라가는 본격적인 답사에 올랐다.‘진중일지’를 작성한 ‘이정’은 김좌진보다 10년 이상의 연상이지만 당시 직책은 김좌진의 비서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속부관’쯤 된다. 십리평 사령부에서 김좌진을 보좌하며 참으로 꼼꼼한 일지를 남겼다. 그런데 이정이 왜 청산리대첩 전 과정에 참전했음에도 9월 13일 이후의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을까? 진중일지처럼 이동 간, 그리고 전투 간 내용도 기록을 해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 이동하면서나 전투 중에 훼절되었다면 다시 기록할 수도 있었을 텐
함에도 180량에 싣고 있었던 그 물품이 무엇이었기에 북로군정서 병력은 청산리에 도착할 때는 허기와 추위에 떨었을까? 무기는 이미 개인이 휴대를 했고, 동계피복 조차 없었다. 그리고 토문자(정확히는 동불사 북골이다)에 이를 때 까지 이 엄청난 치중행렬은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돌려보냈다고 해도 여전히 그 내용물이 궁금할 뿐이다. 필자는 180량 중 군량 곡식 등을 실은 일부는 동불사 집결지로 먼저 갔을 것이고, 대부분은 총재부의 이동에 소용되었을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다.아무튼 이 정도의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자체가 현대
북로군정서는 출발에 앞서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사관연성소 출신 최정예 병력을 중심으로 연성대(혹은 여행대, 교성대라고도 함)를 편성하여 이범석에게 지휘를 맞기고 1개의 확대된 대대로 재편하여 지휘체계를 단순화하였다. 이는 기동력과 최강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병력을 별도로 두어 이동 간 예상되는 조우전에 대비하는 한편, 주력으로서의 즉각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한 조치였다. 출발 당시 사령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사령부 사령관 김좌진부 관 박영희참모장 이장녕참모부장 나중소특무정사 나상원, 권중행연성대 대 장
김좌진의 장계취계는 크게 세 가지조건을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구상되었다. 첫째, 중국군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린 다음 그들의 전의를 꺾어버리자. 둘째, 중국군의 체면과 영예는 최대한 유지시켜 주자. 셋째, 정치적으로 우리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고 우군화 시키도록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전 병력이 모두 군복을 착용하고, 위장용일지언정 전원 소총을 휴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48시간 안에 국방색 군복을 만들고 목총을 만들었다. 이게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관내 모든 학교의 나팔을 총 동원하고, 포수들로 구성된 포수대를 사관생도들
다시 ‘북로아군실전기’를 보자.“작년 8월 10일에는 일본의 강경한 진압으로 인하여 연길중군 맹단장이 군사 150여명을 이끌고 서대포에 와서 우리를 해산 시키려고 백방으로 운동하고 있는 고로 우리는 서로 더불어 일전을 결(決)하려고 전투준비를 개시하였소. 그러나 중국군의 불과 150명 병으로는 우리의 많은 인원을 대적치 못할 줄 알고 먼저 교섭하기를 청하는 고로 우리 측에서도 이에 응하여 교섭원을 보내었소.”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일전을 치루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 보였다는 내용이다.‘이정’도 당시의 상황을 ‘진중일지’
북로군정서의 전투력이 막강했던 이유가 체계적이고 강한 훈련에 있기도 했지만 떠 다른 요인은 바로 최신의 장비로 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는 주로 러시아에서 체코군의 무기를 구입했다. 당시의 생생한 기록은 무기운반경비대 분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한 ‘이우석’의 회고에도 나와 있듯 엄청난 노력과 인력이 소모된 대규모 수송 작전이 필요했다. 이정의 진중일지에 기록된 관련 내용만 보아도 당시의 긴박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7월 5일서무부장 임도준 각하는 러시아 출장 중이므로 동부 경신국장이 서리하다.7월 6일무기운반대 접반원 2명을
이 병력들의 훈련을 위한 연병장은 십리평 들판 쪽에 2개를 조성하고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오전훈련을, 오후2시부터 야간까지 오후수업을 강도 높게 시행했다. 십리평 골짝에는 천여명이 넘는 한국청년들의 군가소리, 함성소리로 그득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관이 펼쳐졌고 땀내가 진동했을 것이다. 훈련과목으로는 오전에는 주로 제식훈련과 전투훈련을, 오후에는 사격술, 총검술, 총기사용법, 기타 학과수업이 진행되었다.이들 중 특히 중등교육 이상의 학력을 지닌 우수대원들은 장교로 양성하기 위해 사관연성소 사관생도로 입교시켰다. 이점도 우리
1919년에서 1920년 9월에 이르는 서대파 골짜기는 그곳에서 땅이 열린 이후 가장 뜨거웠고, 그 열기는 그 청년들이 떠난 후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태평촌 사관연성소가 있던 장소에는 울타리가 쳐져있고 마을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한눈에 막사를 조성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향에다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경사-물론 100년의 세월이 흘러 지형이 다소 변했겠지만, 대형막사 대여섯 채는 세우고도 남을 공간 등 조건은 충분해 보였다. 김좌진이 선정하고 이범석에게 보여준 장소이자 김훈이 날선 목소리로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군정서본부는 서대파 십리평에서 약 3리되는 산골에 있다. 십리평부근에는 상·하 두 곳에 1정보의 네모난 연병장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현재 십리평에서 3리 되는 곳이 아니라 2km정도 떨어 진 곳에 있는 부락이 ‘태평촌’이며 이곳이 일제가 말하는 군정서 본부자리이자 사관연성소가 있던 곳이다. ‘왕청현지명지’에 따르면 원래 모두 십리평으로 불렀는데 십리평의 ‘홍송강’(紅松崗)이 태평촌 마을자리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지금도 적송이 많은 언덕이다. 태평촌이란 이름은 1945년 8월 소련군이 진주할 때 아무런
“길림성 왕청현 서대포는 우리 군정서의 사관연성소의 소재지였소. 작년 2월부터 이 연성소를 설립하고 훈련에 착수하였는데 나는 거기 한 교관이 되어 교수에 종사하였소.” 김훈이 밝힌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1’(독립신문 제 97호, 1921년 3월 1일자)의 첫 구절이다. 김훈이 말한 ‘서대포’가 바로 ‘서대파’(西大坡)다. 다시 한사람의 기억을 더 인용해 보자. 당시 사관연성소 교관이자 제2지대장이었던 이범석은 서대파를 이렇게 말한다.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센(汪淸縣) 시따퍼(西大坡)의 큰 삼림 한 복
앞서 말했듯, 대한정의단은 공교회와 연합한 단체였다. 그렇지만 주도권을 행사하던 대종교 지도자들은 군사문제 비전문가들이었던 만큼, 김좌진을 비롯한 신민회계열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양병과 용병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때까지는 대한정의단 자체가 군사단체는 아니었다. 군사단체로 예하에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두어 군사문제를 전담케 했다. 김좌진이 최초 부임한 직위는 바로 대한정의단의 예하 단체인 대한군정회의 책임자 신분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원화된 조직이자 예속관계이면서도 독립적인, 애매모호한 구석이 없지 않은 직위였던 것이다.그러
중광단에는 서일을 중심으로 현천묵, 백순, 박찬익, 계화, 김병덕, 채오 등이 활약했다. 그러나 당시에만 하더라도 무장투쟁의 차원으로는 발전하지 못했고 주로 계몽운동과 교육사업에 치중하고 있었다. 지도부의 요원 거의가 종교인이다 보니 군사적 식견 즉, 용병과 양병에는 한계가 있었고 무장에 필요한 장비를 갖출만한 재원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19년3월 25일 마침내 유림이 중심이 된 공교회(孔敎會)와 연합하여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발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좌진을 초청하여 군사부 총사령관으로 추대했다. 김좌진 역시 이에
필자가 북로군정서 답사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덕원리’(德源里)다. 덕원리는 그동안 대학생들의 ‘청산리역사대장정’이나 사회지도층의 동북지역 역사탐방 등 수십 차례에 걸쳐 왕청현을 지나다니며 보았던 곳이다. 그러나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을뿐더러 방문 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덕원리의 위치는 흑룡강성 영안시의 끝에 있는 ‘묘령’(廟嶺, 화룡현에도 동일한 지명의 묘령이 있다)을 지나 ‘천교령’(天橋嶺) 고갯길을 하나 더 넘은 뒤, ‘왕청현’(汪淸縣) 소재지인 왕청현성으로 가기 직전 고갯길 가에 자리 잡고 있다. 왕청 방향에서 보면 북
김좌진이 길림으로 간 이유는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를 위함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8년 11월(음력)에 발표되어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린다. 조소앙이 초안을 잡은 내용으로 동경유학생들이 발표한 ‘2ㆍ8 독립선언’(이광수가 작성)이나 최남선이 초안을 잡은 ‘3ㆍ1 독립선언’보다 앞서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서로도 불린다.만주지역은 물론, 러시아와 외국에 산재한 저명인사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이 선언서에 김좌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지명도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가늠이 된다. 김좌진은 1919년
만주에 들어 선 김좌진은 이때 많은 곳을 돌아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처음 만나고 찾아 본 사람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서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있던 ‘이세영’(李世永)이었다.이세영은(1869∼1938) 육영공원 출신으로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무관이자 의병장이었다. 충남 청양출신으로 같은 지역인 이었을 뿐 아니라 항렬 상 김좌진의 종질이자 홍주의진의 사령관이었던 김복한과 함께 을미의병에 참여한 적도 있었고, 대한제국 육군정위로 헌병대장까지 오른 군인 이었다.1913년 6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19
이 대목이 참으로 안타깝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이었던 박상진의 실체가 노출되었고 그의 가족들에 대한 감시가 엄중했을 것임은 자명했을 진데 비록 노모가 위중하다고 했더라도 당시 최대의 비밀결사단체의 수장이었던 그로서는 좀 더 진중한 행동을 했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1907년, 13도창의군의 총궐기 때도 이런 유사한 일이 있었다. 당시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3백 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부대의 지원이 없어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부친의 부음(訃音)을 받은 총대장 이인영이 지휘권을 허
김좌진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1917년 9월경이다. 경의선에 몸을 싣고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들어갔다. 이후 다시 한국 땅으로 들어 온 기록은 2회 정도가 남아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김좌진이 만주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미 안동(현, 단동)에 이창양행지점을 둘 때나 대한광복회에서 위조지폐발행을 위한 활동 등의 이력으로 미루어 봐서 도강 루트는 확보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비록 이진룡이 피체되었다 하더라도 기존의 만주지부 조직은 잔존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과의 연통도 가능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기다리던 군
어재화는 이날 만주로 떠나는 김좌진에게 ‘약간의 여비’까지 쥐어 준다. 1917년경이면 권번은 옛말이 되었고, 등급을 나눈 기녀들은 몸팔기에 나서야 호구가 지탱되던 고약한 시기의 문턱을 지날 때였다.어재화의 생활도 여관방을 전전하고 있음을 볼 때 그냥 돈 많은 한량의 첩실 노릇이나 했던 막기생은 아니었겠고, 쥐어준 약간의 여비는 그 자존심을 갉아내며 마련한 금쪽같은 돈이기도 했다. 그것만 봐도 당대의 독립운동은 갓을 써야 되는 일도, 배움이 깊어야 되는 일도 아니었다.남부여대가 그 속내 깊이에서 발현했던 뜨거운 열정의 표현이었다.
남녀 간의 작별만 가슴시린 것이 아니다. 사나이들의 작별에는 비장함도 함께 한다. 마초적 기질에 근거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릴 일이 아니다. 대의와 명분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때는 비장함이 더해진다.상대가 가는 길이 어떤 곳인지를 알 때는 더더욱 그렇다. 당․송의 명시에는 유난히 ‘송’(送)자가 들어가는 시가 많다. 먼 곳으로 떠나는 친구, 주유(周遊)하다 만나 또다시 방랑길로 떠나는 친구, 유배 길을 나서는 친구에 대한 참담의 비통을 배웅으로 대신하는 절절함 등등 애절한 명시가 회자되곤 한다.그러나 그런 인연에 관한 감성적 회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