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의 북만주행은 박상진을 빼고 이야기하기 힘들고 ‘대한광복단’과의 관계 또한 박상진과의 관계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박상진과 김좌진의 관계는 멀리 1907년경 김좌진이 서울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울산매일신문사가 발간한 ‘고헌 박상진의사의 발지취를 따라서’(2008년)에 의하면 박상진이 22세때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를 배우고 중국외교관을 따라 천진을 여행하며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현장을 목격하는가하면 주한 교관들과 외국인선교사들과 교제하며 신문물과 국제정세를 습득하게 되는데 신돌석, 김좌진과 의형제
김좌진이 북만주를 향해 도만을 한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다만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1917년 8월말에서 9월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먼저 ‘백야실사’의 기록에 의하면 “박상진 등과 광복단사건에 연좌되어 옥중에서 3년을 지내고 출옥 후 ‘남아실수난용지 지사윤생갱대시’(男兒失手難容地, 志士潤生更待時: 남자가 실수하면 세상이 용서치 않을 것이고, 지사가 굳이 살려고 하는 것은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다.)란 간단한 시를 남기고 홀연히 만주로 건너갔다.”라고만 쓰고 있다. 물론 김좌진이 실형을 살았던 것은 맞지만 그 당시 사건이 ‘대한
‘북로아군실전기’는 ‘청산리대첩’에서 북로군정서 ‘종군장교’(참모 및 중대장급 직위)로 참전한 ‘김훈’(金勳)이 청산리대첩 후 연락장교 임무를 띠고 상해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최초로 청산리대첩의 승전보를 알린 기사의 제목이다.이 기사는 ‘독립신문’ 97호(1921년 3월 1일자)와 98호(동년 3월 12일) 2회에 걸쳐 ‘북로아군실전기 1, 2’로 게재된 내용으로 김훈의 구술을 정리한 형태로 쓰여 있다.‘1. 전투전 피아의 형세, 2. 양군의 대립한 형세, 3. 청산리부근의 전투, 3. 이도구부근의 전투, 5. 맹개골부근의 전
‘백야’ 김좌진의 순국지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에 위치한 '한중우의공원 관장으로 재직한 지도 벌써 10년이다. 10년의 시간 속에는 기념관의 관장으로써 매달려야 했던 일상도 녹아있고, 자식들의 혼사를 비롯한 구순 부모님의 병환 등 가정사에 대한 무관심과 그로인한 아내의 인내도 녹아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비롯하여 여러 계층과 함께한 답사길 지도교수로서의 보람도 함께한 시간이기도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가슴 한구석에 부채 비슷한 부담으로 남아 있는 숙제가 있었다. 그것은 김좌진에 대한 평전, 연구논문, 각종 발표문 등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