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기록'이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2021년 12월1일 부터 10개월여간 64회에 걸쳐 게재했다.'바람의 기록'은 '독립전쟁 청산리대첩' 주력부대인 북로군정서의 이동 경로를 국내 처음으로 직접 답사한 뒤 출간한 역사기록물이다. 그동안 김좌진에 대한 평정, 연구논문, 각종 발표문, 일제의 자료 등은 부분적인 답사기록에 근거하는 한계가 있었다. 청산리 대첩을 앞둔 북로군정서의 전 동선을 총정리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필자인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이 청산리대첩 시작전 부터 전투 전 과정의 행
만기구 삼림에서 마주친 적을 순식간에 격퇴하고 후방 산림으로 철수한 김좌진은 산중에서 다시 1박을 하였다. 그리고 10월 24일 날이 밝자 맹산하를 따라 서북방향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가 ‘서구’(西沟)전투다. 서구는 우리 동포들의 호칭으로는 ‘서골’로 불리며 맹가구에서 10리 정도 떨어 져 있다. 그러니까 장인하의 지류부근에서 산과 계곡을 넘으며 은밀하게 조금씩 이동을 해 갔다는 말이 된다. 북로군정서의 한 개 제대이긴 하지만 이 서골 전투가 정규군이 맞붙은 마지막 전투라고도 할 수 있다.우리는 이 전투를
전쟁 중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아군이나 적군이 모두 사선을 넘나드는 상황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만기구’(萬麒沟)전투가 딱 그런 경우다.김좌진은 맹가구 전투에서 적의 기병정찰대를 물리친 후 20리 정도를 이동시켜 만기구 부근에 이르러 휴식하게 했다. 이는 김훈의 기억이다. 그러나 실제는 맹가구(맹산)에서 만기구까지는 6km정도 떨어져 있다. 산길로 행군하다 보면 그리 느낄 수는 있다. 그리고 만기구 부근 삼림지역이라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지점까지는 확인하기 힘들다. 대략 만기구 부근 이라고 알 수밖에
어랑촌에서 철수한 북로군정서는 ‘만기구’(萬麒沟)방향으로 이동한 후 산중에서 야영을 하였다.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도양차’방향으로 ‘화집구’(華集沟)를 따라 가다가 ‘중향’(中鄕)부근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이수구하’(梨水溝河) 옆의 산록이거나 혹은 ‘충청구산동’(忠靑溝山洞) 쯤에서 숙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대략 4시간 정도 행군은 했다고 보이며 달도 저물어 가는 시간이다. 늦가을 찬바람은 이미 겨울이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20일 밤 백운평골짝으로 이동한 이후 사흘 밤
어랑촌에서의 승리 뒤에는 위대한 투혼과 고귀한 희생이 함께 숨 쉬고 있다. 10여 시간에 걸친 하루 주간전투에서 일본군 천여 명을 궤멸시킨 이면에 북로군정서 대원들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이범석은 적군 1,000여명 사살에 아군100명이 희생되었다고 했고, 상해에서 출간된 ‘진단’(제7호, ‘200명 의사들의 피 연변에 뿌렸다’, 1920년 11월 21일)에는 아군 200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희생의 바탕위에 승리의 영광이 탄생할 수 있었다.1921년 1월 15일자로 서일총재가 작성한 청산리대첩에 관한 ‘전투상보’(戰
홍범도부대가 전투를 치른 완류구에서 북로군정서가 전투 중이었던 874고지까지는 불과 3km이내의 거리다. 물론 지형은 대단히 험하다. 해도 4km 이내로 떨어진 거리라면 최소한 2~3시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홍범도부대가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면 오후 2시~3시 정도에는 일본군이 보이는 지역에 부대를 전개시킬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완류구전투는 약 3~4시간의 짧은 시간에 전투가 종료되었다. 피해도 경미했다. 그렇게 본다면 홍범도부대가 874고지의 맞은편 북쪽 사면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기병연대 후방내지는 우측을 공격했으
어랑촌 전투는 일반적으로 ‘북로군정서가 고전을 하고 있을 때 홍범도부대가 배후에 나타나 후방공격을 해 줌으로 일몰시에는 일본군이 물러나고 아군도 철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임정 군무부의 기록이나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 이범석의 ‘우둥불’ 등 당시의 참전자 기록에는 홍범도부대의 참전에 대한 기록이 없다.심지어 이범석의 경우 지청천은 물론 홍범도와도 연합작전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 북로군정서가 송림평 일대에 부대를 전개한 것은 홍범도, 안무, 최진동 등이 북로군정서를 주방어부대로 하고 홍범도부대가 터시
실재 일본군은 러일 전쟁 시에도 여순의 백옥산 하나를 점령하기 위하여 6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마치 6·25 당시 중공군이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도스께끼’(돌격,突擊)만을 종용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전쟁에서는 이겼다. 그 육상전의 지휘관이었던 ‘노기 마레스께’는 군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피아 구분 없는 잔인한 살육이 전쟁의 본질로 생각하는 비인간적 민족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런 것들이 일본군의 인명경시와 돌격신화에 매몰된 전쟁사상을 낳았던 것이다. 이런 양상은 태평양전쟁까지 그대로 적용되었다. 총을 든 상대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에 기록된 어랑촌 전투다. 길지만 모두 인용한다.“동 9경부터 피아가 공히 고지를 점거하고 전투를 개시할 새 우리 제1중대가 어랑촌 고지 남측 기슭에 선등(先登)하야 산복(山復, 산능선)으로부터 복상(伏上, 포복으로 접근)하는 적을 급사(急射)하매 적은 혹은 중탄(中彈, 총알에 명중)하여 죽으며 혹은 괴주(궤주의 오기, 潰走)하여 퇴하였나이다.우리의 여행단과 기타의 부대는 천수동 서북쪽고지에서 그 우측으로 협박(狹迫)하려는 적의 기병을 난사하야 진행을 제재(制裁, 저지)하고.어랑촌 산림 후방으로부터 적의 보병 1
천수평에서의 승전 후에도 김좌진은 부하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어랑촌 일대에 집결된 일본군이야 말로 북로군정서를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본진이었다. 우선 이들을 궤멸시켜야 했다. 백두산일대에서 주둔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그랬고 차후를 기약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진검승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부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택한 마을이 갑산촌이었고, 천수평은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시 병력을 다음 전장으로 이동시켰다. 여행단은 874고지 3부 능선 정면에, 그리고 1개 중대는 천수평 동남쪽 계남촌 지역의 54
천수평 마을은 현재 없다. 갑산촌에서는 봉밀하를 따라 도로로 이동하다가 ‘계남’(鷄南)에서 좌측으로 또 하나의 물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이 물길의 이름이 지금도 ‘천수동구’(泉水洞沟)다. 중국인들은 ‘양수천자’(凉水泉子)라 불렀다. 거기에서 어랑촌까지는 8km가 채 안 된다. 갑산촌에서 급하게 일어난 북로군정서 대원들은 계남 방향으로 가지 않고 바로 산을 넘었다. 고갯길 두 개만 넘으면 된다. 천수평에는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조선인 10세대, 중국인 1세대가 살았다고 하였으나 이범석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 천수평골 안에 3
김좌진인들 8척 장신의 서른둘의 왕성한 혈기에 춥고 배고프지 않았을까? 연성대장 이범석도 마찬가지였다.“추위와 주림과 피곤이 온 몸을 휘감았다. 한나절의 격투를 치루고도 우리는 한방울의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산바란이 길을 막는 비탈길을 더듬어 자산춘(甲山村, 갑산촌의 중국음)으로 향했다. … 만주의 깊은 가을바람은 예리한 칼로 오려 내듯이 홑 옷으로 가린 우리 살을 에었다. 밀림 속에는 길이 없다. 그저 우리가 밟고 가는 곳이 길이다. 쓰러진 수목과 허물어진 바위의 돌가루가 도처에 쌓여있고 산비탈은 갈수록 험해질 뿐이었다. 밀림을
이날을 위해 왕청에서 모질다 할 만큼 강훈련을 시켰다. 그 역량이 여실히 드러났다. 명령체계는 톱니바퀴처럼 완벽했고 명령수행 능력은 그 어떤 군대보다 탁월했다. 김좌진은 부하를 믿었고 부하들은 김좌진의 명령수행이 곧 승리를 보증한다는 것을 확신했다.이범석의 우둥불에 나와있는 쌍방의 피해는 일본군이 2,200여명 사망, 아군 전사자는 20명이며 중상자가 3명이며 20여명이 행동이 가능한 경상자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여러 연구서나 일본군의 당시 제대편성으로 보면 야마다 본대나 나까무라 우회부대를 포함하여 900명 남짓이다. 그렇다면 첫
당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백운평 5·60여 가구 중 단 두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외지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구사일생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연변지역의 조사에 따르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람은 모두 살해하고 가옥은 완전 방화로 마을 자체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두 사람인들 살아도 살았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더더욱 치를 떨게 하는 일은 1921년 2월 25인자 19사단사령부가 남긴 ‘간도사건에서의 조선인과 중국인의 사상자 조사표’에 의하면 1920년 10월 21일 “변장한 김좌진의 부하 49명을 청산리에서 총살하였다.”고 했
백운평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북로군정서가 갑산촌을 향해 이동하던 그 시각, 야마다대좌는 참혹한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전위대는 물론 후속부대와 우회부대까지 계곡을 가득매운 시신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성도 함께 잃어버린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백운평마을 상대로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한다. 일제는 ‘간도출병사’에 그날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10월 21일 야마다대좌가 인솔한 부대는 이 지방부근에서 무장한 불령선인단과 전투를 하여 약 30명을 사살하였다. 당시 적도는 이 부락민들과 함께 마을 안에다 진지를 수
편의대란 민간복장을 하고 거짓정보를 흘리거나 정탐을 하는 일봉의 정보원을 말한다. 김좌진은 편의대까지 운용하는 주도 면밀함을 보였다.이때 활약한 편의대원중 한 명이 용정 ‘15만원 탈취사건’의 주역이자 ‘철혈광복단원’이었던 ‘전성호’다. 굶주림과 무기도 없는 조선인들 무리가 청산리계곡으로 바로 전에 들어갔다고 했던 것이다. 아스가와는 북로군정서가 진지를 편성하고 작전명령까지 하달하고 있으리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 정도의 전술적 행동을 구사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비록 현천묵의 주장대로 피전책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김좌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미 의지도 다졌고 계책도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피전토록 진행되지도 않았다. 이제 적을 어떻게 괴멸시키느냐의 전술적 방책을 강구하는 일만 남았다.직소택 아래 계곡은 청산리골 중에서도 가장 폭이 좁고 양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경사지로 이루어져 있어 매복진지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김좌진은 제대를 둘로 나누었다. 제1제대는 김좌진이 직접 지휘를 하여 직소택을 둘러싸고 ‘사방정자’(四方頂子)의 산기슭에 배치하고 2제대는 계곡이 내려다보
백운평의 상징 직소택은 청산리계곡에서 산세가 험하기로 으뜸이다. 지금도 나무가 울창하여 아래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나뭇잎이 다 진 겨울에도 그러할 진데 아직 나뭇잎이 남아 있는 가을이나 여름은 말해 무엇하랴. 직소택부근의 남북 양쪽의 경사도는 60~70도가 족한 급경사다. 지금은 골짜기 북쪽 산중턱에 안도방향으로 가는 도로가 닦여 있는데 이 도로가 1935년에 일제가 만든 군용도로다. 인적이 없어 차량이동이 안 될 만큼 도로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예전 1920년 당시에는 험한 산을 피해 계곡옆으로 도로가 하나 있었는데 소수레
청산리골의 끝 지점인 ‘직소택’(直沼澤) 부근까지 병력을 물린 김좌진은 사전 지형정찰을 마쳤다. 그리고 청산리 골의 지형적 특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계곡은 넓었다 좁았다를 반복하고, 계곡을 향해 뿌리를 내린 산등은 구불구불한 계곡 길을 만들었다. 증봉리나 백운평지역을 제외하고는 바위와 엉킨 물길 뿐, 마을을 이어주는 우마차 1대 정도의 소로 외에는 이동도 불편했다. 아군의 이동도 힘들었지만 적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길도 한 곳 뿐이었다.남쪽으로는 베개봉을 휘도는 침봉산이 가로 막혀 있고 북쪽으로도 거의 4~50도 경사의 산 사면
마침내 전쟁은 현실이 되었다. 북로군정서 총재부가 피전책을 제기한들 이미 정황은 교전이 불가피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일제는 시시각각 추격과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김좌진의 움직임까지도 첩보수준을 넘어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역시 적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에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10월 19일 밤에 아군은 송리평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60리 되는 싸리밧촌에 도착하여 몇시간의 잠을 청하고 있던 중 적군 200명은 평양촌(송리평 상촌이니 피아의 거리가 20리)까지 쫒아들어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