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면 접으라"는 구광모...LG전자 DNA 바꾼다

신년사 통해 ‘팬’ ’열광’ 강조…고객 가치 기업에 방점 LG전자 차별화 집중…흑역사 스마트폰 과감히 정리 전장·AI·로봇에 무게…콘텐츠 서비스로 IT 정체성 부여

2021-04-14     변윤재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LG)

 LG폰이 26년 역사를 뒤로 하고 퇴장을 결정했다. 지난 1월 매각설이 불거졌을 당시 일견 예상된 수순이기는 했지만, LG전자 내부에서는 마지막까지 스마트폰 사업에 대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롤러블폰에 대한 전파 인증이 통과된 데 이어 레인보우폰의 AI 성능 테스트가 진행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끝까지 신제품 출시를 추진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5년 모바일 사업을 시작한 이후 숱한 매각설, 철수설에도 LG전자는 스마트폰 사업을 놓지 못했다. 피처폰 시절, 다수의 히트작을 내며 세계 3위의 제조사로 군림했던 것도 잠시, 2015년 2분기부터 올1분기까지 2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누적 적자만 5조원대에 달했다. 전략 부재, 브랜드 가치 하락, 품질 논란 등 LG폰의 흑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이었다. 

구 회장 또한 모바일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혁신적인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까닭에 LG폰의 다양한 시도들을 지켜봤던 것. 그러나 경영자로서 구 회장은 좀더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타 사업부서의 이익에 기대는 모바일 사업을 계속 지속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이는 구 회장이 강조하는 ‘팬덤 경영’과 맞닿은 선택이기도 하다. 

대기업 총수로선 이례적으로 ‘열광’ 강조

“그동안 우리가 고객 ‘페인 포인트’(Pain Point)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이를 넘어 고객을 더 세밀히 이해하고 마음 속 열망을 찾아야 찾아 고객 감동을 키워갈 때입니다.”

구 회장의 올해 신년사는 색달랐다. 구 회장은 고객의 관심·취향·요구를 집요하게 파고들자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LG의 팬을 만들자, 고객을 열광시키자’고 했다. 냉철한 기업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열광’이라는 단어를 꺼낸 배경에는 ‘고객 가치 경영’이라는 소신이 있었다. 

구 회장은 취임 이후 줄곧 ‘고객 가치 경영’을 강조해 왔다. 제조업 기반의 LG를 대표하는 단어는 ‘인화’였다. 내부적으로는 조직의 결속을, 대외적으로는 협력사 등과의 상생에 집중하는 전략이다. 다만 업종 간 경계가 무너지고 ICT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한 융·복합이 활발해지면서 이 전략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구 회장은 투자자·사용자 관점에서 경영 전략을 다시 짰다. 사업의 성과와 효율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성장성이 유망한 사업을 키우고, 소비 수요나 효율이 떨어지는 사업을 정리했다. 

취임 첫해였던 2018년 11월 LG서브원의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사업을 분할해 매각했다. 차세대 연료전지 개발을 위해 인수했던 연료전지 자회사 LG퓨얼셀시스템즈가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자 이듬해 2월 정리했다. 향후 가치를 보고 성장동력으로 키우려던 수처리 관련 자회사인 하이엔텍과 환경시설 설계·시공회사 LG히타치워터솔루션 역시 2019년 7월 청산했다. 4월엔 LG디스플레이의 조명용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사업을, 11월에는 적자가 계속된 LG이노텍의 스마트폰용 메인기판(HDI) 사업을 각각 정리했다. 12월엔 LG유플러스의 전자결제사업을 모바일 송금서비스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에 넘겼다. 

지난해에도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기업의 성장을 크게 기여하지 않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청산해갔다. 2월 LG전자, LG화학, LG상사 등이 중국 베이징 트윈타워 지분을 매각했다. LG화학의 LCD(액정표시장치) 컬러 감광재 사업을 중국업체에 매각했고, 유리기판 사업에서 철수했다. 이어 LG화학이 갖고 있던 LCD 편광판 사업을 중국업체에 넘기면서 수익성이 악화된 LCD 사업에서 발을 빼고 OLED 전환을 본격화했다.  

구 회장의 이 같은 선택은 LG의 체질을 바꿔 주주와 시장관계자, 소비자 등 LG의 모든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LG전자의 주력사업이었던 스마트폰 사업도 고객 가치 경영이라는 기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남들과 다르게 고민하라” 29번의 고객 언급

“평범하고 보편적인 니즈가 아니라, 고객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니즈를 찾아야 합니다. 만약 기업이 고객이라면 그 회사가 남들과 다르게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고객 인사이트’라 생각합니다.”

구 회장은 신년사에서 고객을 강조했다. 무려 29번이나 언급했다. 그러면서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숨겨진 열망, ‘니즈’를 발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LG전자 사업에 적용해본다면, LG폰의 철수는 ‘숨겨진 열망’에 대한 동력이 사라진 데 따른 당연한 수순이었다. 

LG폰의 최근 7년은 ‘고군분투’ 그 자체였다. 2014년 G3의 선전으로 그해 2분기 1450만대의 스마트폰을 판매하며 분기 최대 판매기록(1320만대)을 갈아치웠다. MC사업본부도 2013년 2분기 이후 4분기 만에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하지만 ‘혁신’에 대한 집착, 피처폰 시절의 영광은 독이 됐다. 천연가죽처버, 모듈형, 보조화면, 듀얼 카메라 등 실험적 제품들에 소비자의 반응은 싸늘했다. 결국 전 세계 시장에서 LG폰의 존재감을 주력 사업이라 불리기 민망한 정도로 작아졌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에 따르면 LG전자의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1.1%에 불과했다. 2014년 4.3%에서 매년 감소하더니 결국 2%의 벽도 무너졌다. 전략 스마트폰인 LG윙이 출시됐던 4분기에도 760만대를 파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는 6250만대, 애플은 8190만대를 판매했다. 샤오미, 비보, 오포, 화웨이보다도 낮을뿐더러 오포의 서브브랜드인 리얼미(1400만대)와 비교해서도 절반 수준이다. 

그나마 국내와 북미, 중남미에서는 순위권에 들었지만, 1·2위 업체와의 격차가 상당했다. LG전자 지난해 판매 비중을 보면, 미국 52%, 남미 29%, 한국 7% 순이다. 미국에서는 애플(50%), 삼성전자(25%)에 이어 3위(19%)에, 중남미에서는 삼성(41%), 모토로라(18%), 샤오미(6%)에 이어 4위(4%)에 안착했다. 국내시장에서도 삼성전자(65%), 애플(21%)의 뒤를 이으며 3위(13%)에 올랐다. 사드 보복 이후 국내에서 강해진 반중 정서와 화웨이 제재에 따른 반사이익을 얻었음에도 수익성 개선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만큼 입지를 다지지 못했던 것이다. 제품 포트폴리오 개선, 제조자개발생산(ODM) 비율 확대, 인력 전환 배치 등으로 원가를 절감했지만 8000억대의 적자를 면치 못했다. 

지난해 12월 LG AI연구원은 출범식에서 배경훈 원장이 향후 계획을 발표하는 모습 (사진=LG전자)

전장-AI로 ‘고객 가치 기업’ 전환

구 회장의 궁극적 목표는 고객 가치 기업이다. 소액주주들과 국민연금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LG화학의 분사결정을 내린 것도 경쟁력 강화를 통한 고객 가치 향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에 따라 LG전자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니즈’를 발굴해야 했다. 구 회장이 전장과 AI에 주목하는 이유다.

친환경·전기차가 운송수단의 중심축으로 부상하면서 전장은 세계 IT기업들이 눈독들이는 분야다. LG전자도 2013년 VS사업본부를 통해 전장사업을 운영하면서 기반을 다져왔다. 선제적인 투자도 이뤄졌다. 구 회장은 2018년 LG그룹 최대 규모인 1조4000억원을 투입, 오스트리아 차량용 프리미엄 헤드램프 회사 ZKW를 전격 인수했고,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전장사업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도 3조원을 투입했다. 2019년 말 VS사업본부 내 차량용 램프 사업을 ZKW로 이관·통합해 효율화를 꾀하는 한편, 시장 내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저가 수주도 마다하지 않았다. 

ICT 기술이 광범위하게 적용될 전기차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협력도 모색하고 있다. 합작법인을 세워 전기차 핵심부품과 운영체계 경쟁력을 빠르게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기업 룩소프트와 알루토를 세워 인포테인먼트먼트 사업을, 세계 3위 자동차 부품 업체인 캐나다 마그나인터내셔널과는 LG마그나 이파워트레인을 설립해 파워트레인 사업을 육성한다. 실제 구 회장의 적극적인 투자 덕에 LG전자의 전장사업은 상승세를 탔다. 지난해 4분기 적자를 20억원으로 대폭 줄인 데 이어 H&A 사업본부와 HE사업본부 다음으로 높은 분기 매출을 달성하며 반등의 기지개를 켰다. 

AI(인공지능)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낙점한 것도 다양한 loT(사물인터넷), 5G와 결합해 시너지를 내기 때문이다. 가전·TV·전장 등 LG전자의 모든 사업 영역에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 구 회장은 “LG가 추구하는 AI의 목적은 기술을 넘어 고객의 삶을 더 가치 있도록 돕는 것에 있다”며 3년간 인재 확보·AI 연구개발 등에 2000억원을 투자해 원천기술 확보를 비롯한 기술력 고도화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에 지난해 12월 LG전자·LG디스플레이·LG화학·LG유플러스·LG CNS 등 16개 계열사가 참여하는 전담 조직인 LG AI 연구원을 설립하고 AI 석학인 이홍락 미국 미시간대 교수에게 핵심 역할을 맡겼다. 현재 연구원은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 해외 AI 연구기관 등과의 협력을 통해 최신 AI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AI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지난 2월에는 사람처럼 설명하고 학습하는 AI 기술에 대한 연구성과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AI 관련 투자도 늘렸다. LG전자, LG화학, LG유플러스, LG CNS 등 4개 계열사는 소프트뱅크벤처스가 조성한 약 3200억원 규모의 펀드에 200여억원을 공동 출자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LG)

‘이제는 IT’ LG전자 진화 이끄는 구광모 

구 회장은 LG전자를 전자기업에서 IT기업으로 진화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경영관리는 물론, 생산현장에서 디지털 전환을 속도를 올리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LG전자는 경남 창원사업장에 자동화·지능화 기술이 적용된 통합관제시스템을 도입키로 하고 작업을 진행 중이다. 

변화의 속도를 올리기 위해 내부 전열을 가다듬는 작업도 꾸준히 이어졌다. 1년차에는 3M 수석부회장 출신인 신학철 부회장(LG화학)을 영입하며 순혈주의를 깼다. 이후 조직의 유연성을 강화하기 위해 인적 쇄신을 지속했다. 조직 내 디지털 전환(DX)을 가속화하고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로봇, 5세대 이동통신(5G) 등 4차 산업혁명 핵심 먹거리 역량을 강화할 젊은 피와 이공계 인재를 전진 배치한 것이다. 지난해 상무 승진자 124명 중 24명이 45세 이하였다. 1980년대생 임원 3명도 새롭게 발탁했다. 23명의 외부 인재를 수시로 임원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다만 IT기업으로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유망 혁신기술을 선점하고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서비스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책임질 퍼즐이 로봇과 콘텐츠 데이터다. 2018년 7월에 제조용 로봇업체 로보스타 경영권을 인수한 데 이어 지난해 말 로봇사업센터를 비즈니스솔루션(BS)사업부로 이관하고, 본부 직속으로 BS연구소를 신설했다. 로봇시장 진출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LG전자는 안내로봇·홈로봇·셰프봇·서브봇 등을 상용화했고, 살균봇이 북미 진출을 앞두고 있다. 

콘텐츠 데이터를 활용한 사업 또한 활발히 추진 중이다. 이미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IT기업은 물론이려니와 삼성전자, SK텔레콤, 쿠팡 등 전 산업군이 콘텐츠 서비스 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내 유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이용률은 2018년 하반기 기준 30%에서 2019년 34%로, 지난해에는 46%로 빠르게 늘어났다. OTT 플랫폼에 대한 수요가 상당하다는 반증이다. 이에 따라 TV를 인터넷에 연결해 다양한 콘텐츠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스마트 TV 판매량도 크게 증가했다. 지난해 전 세계에 출하되는 TV 가운데 스마트 TV의 비중은 83% 이상, LG전자 역시 스마트 TV의 비중은 90% 이상이었다. 삼성전자의 삼성TV플러스, 소니의 구글TV 등은 이러한 OTT 수요를 겨냥한 서비스다.

LG전자는 지난 1월 미국 스타트업 알폰소를 인수하며 자사의 웹OS를 미디어 플랫폼으로 키우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알폰소는 AI 기술을 기반으로 TV 광고와 콘텐츠를 분석하는 기업으로, 북미에서만 1500만 가구의 TV 시청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AI 영상 솔루션 수준도 상당하다. 알폰소의 개인 맞춤형 추천 알고리즘을 LG 채널에 적용할 경우, 소비자를 끌어오는 것은 물론, 개인 맞춤형 광고를 통한 수익 창출, LG전자 전 사업 영업에서의 시너지도 기대할 수 있다.

기업 전문가는 “구 회장 들어 LG의 DNA가 바뀌고 있다. 인화에서 도전·혁신과 같은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업으로 변했다는 인상”이라며 “가전 외에도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해 안착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가치 제고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룹의 위상도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