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그룹, 이번에도 '통상 압박' 공격수 맡았다
오는 22일 한미정상회담…삼성전자 등 비공식 경제사절단 동행 '바이 아메리카'가 기본 기조…자국 경제 활성화 위한 투자 압박 반중 동맹 노골적 종용…배터리‧반도체 등 40조 투자로 동맹 '기름칠'
재계가 이번에도 경제외교 사절단 역할을 할 전망이다.
18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SK·LG·현대차 등 국내 4대 그룹이 오는 22일(한국시간)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첫 한미정상회담에 비공식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한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재계의 역할은 막중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경제를 안보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어서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궁극적으로 안으로는 내수 회복을, 밖으로는 세계 패권의 중심으로서 위상 회복을 목표로 한다. 방법론에서는 다르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방향성은 같은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통수권자로 첫 권한을 행사한 것도 바이 아메리카 행정명령 서명이었다. 이에 따라 바이든 대통령도 중국에 대한 견제의 고삐를 죄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12일 반도체 CEO 서밋에서 직접 웨이퍼를 들어보이며 “오늘의 인프라”라고 규정하면서 “중국과 세계의 다른 나라는 (반도체 투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미국이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 것은 기업에 대한 투자 압박이자, 우리 정부에 향한 ‘반(反)중국 동맹’ 종용이기도 했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협력이 필수적이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우리 정부로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최근 양국 간 신뢰는 적지 않게 훼손됐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협력의 물꼬를 트고 통상 압박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묘수로서 재계의 역할론이 부각되고 있다.
이를 반증하듯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7일 대외경제장관회의 및 대외경제협력기금운용위원회에서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구체화되고 경제와 안보의 결합이 강화되는 추세”라며 “한미정상회담은 양국 경제의 신속한 회복과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된 협력관계 구축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단 국내 주요그룹들은 오는 21일(현지시간)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현지 투자계획을 결정짓는 분위기다. 바이 아메리칸, 그린뉴딜 기조에 맞춰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 산업의 현지 공급망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예상되는 투자액 규모는 40조원 이상. 이를 지렛대 삼아 미국에 백신 지원을 받는 식의 맞교환이 성사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바이든 정부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반도체. 한 달 사이 2번의 회의를 진행할 정도다. 경제동맹의 핵심인 만큼, 삼성전자가 조만간 투자 계획을 확정할 것이라는 업계의 중론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경쟁력 강화를 위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공장 증설을 검토 중이다. 170억달러(약 20조원) 규모의 신규 공장 설립을 놓고 오스틴시와 인센티브 협의가 진행 중이다. 다만 오는 20일 미국 상무부 주최의 화상회의에 참석하는 만큼, 미국 정부의 투자 독려에 화답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지난달 백악관 주재 반도체 CEO 서밋에 참석한 기업들은 투자를 공식화했다. 전세계 파운드리 1위인 대만 TSMC는 향후 3년간 미국 생산 라인 증설에 1000억달러(약 110조원)를 투자키로 한 데 이어, 애리조나주 피닉스시에 3나노 공장 6곳을 구축하기 위해 360억달러(약 40조5000억원)를 더 투자할 계획이다. 인텔 또한 애리조나주에 200억원(약 22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 증설 계획을 발표했다.
SK와 LG는 차세대 성장 동력인 배터리 투자를 통해 사업 확대와 경제 협력 강화를 동시에 꾀할 것으로 예상된다.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은 영업 비밀·특허 침해 소송전을 벌이면서 중국업체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 시장조사기관 SNE 리서치에 따르면 1분기 전세계 시장에서 중국 배터리 5사(CALT·BYD·CALB·AESC·Guoxuan) 점유율은 45.0%로 지난해 같은 기간(29.2%) 보다 15.8%포인트 내려갔다. 이에 반해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이노베이션)의 합산 점유율은 30.9%로 전년 동기(37.8%)보다 6.9%포인트 줄었다. 특히 CATL은 지난해(3.6GWh)보다 사용량이 320.8% 증가하면서 LG엔솔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후보 시절부터 2025년 탄소국경세 신설 등을 공약하며 친환경 정책을 내세웠던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파리기후협약 복귀를 선언한 데 이어 연방정부 관할 모든 차량을 미국산 전기차로 교체하도록 지시하는 등 전기차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중국업체들이 미국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현재, 핵심 배터리 공급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추가 투자를 단행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대한상의 회장으로 경제사절단을 이끌 얘정이다. 방미 기간 조지아주의 SK이노베이션 배터리공장도 직접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은 26억달러(약 3조160억원)를 투자해 배터리 1·2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2023년 양산에 들어가면 연간 43만대 분량(21.5GWh)의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3·4공장 추가 건설과 글로벌 완성차업체와의 합작공장 설립도 검토 중이다. 추가 투자액은 2조원 이상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LG그룹에서도 LG엔솔의 투자가 유력시 된다. LG엔솔은 지난달 미국의 자동차회사 GM과 합작법인 얼티엄 셀즈를 통해 테네시주 스프링힐에 제2합작공장을 건립하기로 하고 총 2조7000억원을 투자한다. 이를 통해 2024년 상반기까지 1·2공장을 합해 총 70GWh 이상의 생산능력을 갖춘다는 구상이다. 이는 1회 충전 시 500km 이상 주행이 가능한 순수 전기차 100만대에 탑재할 수 있는 양이다. 별도로 LG엔솔은 2025년까지 미국 내 2곳에 5조원 이상을 투자해 독자 배터리 공장도 신설한다. LG엔솔을 이끄는 김종현 사장이 이번 순방길에 함께 오른다는 점에서 투자 윤곽이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회장이나 계열사 CEO가 동행하진 않지만, 투자를 일찍감치 확정지었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총 74억달러(약 8조1417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시장 상황과 친환경차 정책 등을 검토해 단계적으로 생산을 확대하고, 전기차·수소·도심항공모빌리티(UAM)·로보틱스·자율주행 등 미래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투자도 진행한다. 또 미국 내 수소 생태계 확산을 위해 미국 정부·기업들과 적극 협력할 계획이다. 수소충전 인프라 실증, 항만 등과 연계된 수소전기트럭 활용 물류 운송, 수소전기트럭 상용화 시범사업, 연료전지시스템 공급 등을 추진한다.
일각에서는 국내 주요 그룹들이 대미 투자를 단행하는 것에 대해 우려섞인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미국시장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전략적 투자인 동시에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경제동맹은 이전에도 무역장벽을 뚫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었다. 이로 인해 역대 정부에서도 방미길에 경제사절단이 수행해왔다.
2003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방미 당시 고(故)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와 경제단체장 31명이 수행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순방길에도 20명이 넘는 사절단을 함께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는 2013년 51명, 2015년에는 166명의 역대 최대 사절단아 순방길에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도 트럼프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 당시 52명의 기업인·경제인이 동행했다. 각각의 순방 때마다 재계는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2017년 방미 당시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그룹 등은 현지 공장설립, 생산설비확충, R&D 투자, 현지기업 M&A 등으로 5년 동안 128억달러(약 14조6000억원)를 투자하고, 미국에서의 구매도 224억달러(약 25조5000억원)로 늘리기로 약속했다.
재계에서는 경제동맹은 시작일 뿐,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민관의 공조가 지속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중 간 무역갈등으로 중국 업체를 대신하고자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 기업과의 협업을 모색하겠지만 결국 미국 내 산업을 보호·육성 쪽으로 무게를 둘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국제 통상 전문가는 “바이든 행정부 기본 기조는 ‘바이 아메리칸’이기 때문에 우리 기업이 혜택을 볼 것이라는 시각은 근시안적 관점”이라며 “미국 국민들은 트럼프식 보호주의에 익숙해졌고, 차후 선거나 미국 내 투자 활성화 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더 센 보호 무역주의로 갈 수 있다. 통 큰 투자는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인 만큼, 정부와 기업이 손발을 맞춰 연구나 신기술 개발을 활성화될 수 있도록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