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길림군정사 가입하다
[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8)
김좌진이 길림으로 간 이유는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를 위함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8년 11월(음력)에 발표되어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린다. 조소앙이 초안을 잡은 내용으로 동경유학생들이 발표한 ‘2ㆍ8 독립선언’(이광수가 작성)이나 최남선이 초안을 잡은 ‘3ㆍ1 독립선언’보다 앞서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서로도 불린다.
만주지역은 물론, 러시아와 외국에 산재한 저명인사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이 선언서에 김좌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지명도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가늠이 된다. 김좌진은 1919년 초, 당시에 이미 만주일대에서는 실력과 능력을 겸비한 지도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만 봐도 그렇다. 김교헌, 신규식, 박은식, 안창호, 김동삼, 이시영,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용, 이세영, 신채호, 유동열, 김규식, 이승만, 박용만, 안정근, 정재관 등 당대 최고의 민족지도자들이 서명했다. 이들과 함께 김좌진의 이름도 나란히 등재되어 있다.
참고로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상세 내용은 필자의 저서, ‘주해 백야실사’, 2016, 백야 김좌진기념사업회 간행. 참조)은 축약하자면 대략 이렇다. 먼저 한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자 민주에 의한 자립국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한편 일본이 사기와 강박은 물론 무력을 사용한 강제 병합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 오게 할것’을 요구하며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력사용을 불사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의 독립은 정당한 권리의 행사이므로 이천만 동포들은 국민된 본령이 독립이므로 육탄혈전을 감수하고 결사적으로 항쟁하여 독립을 되찾자고 요구하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의 무저항주의가 아니라 항일무장투쟁의 정당성을 호소한 이 선언문은 신채호나 이회영의 사상에 더 가까운 열혈투쟁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김좌진은 이 내용을 사전에 보고 동조했을 것이다. 대한광복회에서의 실패로 의열 투쟁의 한계도 절감한 바 있고, 1919년의 만주지역에 무르익고 있는 독립전쟁의 희망적 열기 속에서 김좌진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길림군정사’의 가입이었다.
한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의 독립정신’(채영국, 2007)에는 3ㆍ1운동 전에 이상룡과 김좌진이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서간도의 한국인 수가 증가하고 그동안 꾸준한 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해 이제는 일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실시해 볼만하다고 민족 운동가들이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혈기왕성한 담력과 기개를 지닌 김좌진이 이상룡을 찾아왔다. 김좌진은 아직 20대 후반이었으나 애국개몽운동과 교육운동, 그리고 1910년대 국내 최대의 의열투쟁 조직인 대한광복회의 부사령으로 활동하는 등 화려한 항일운동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독립운동계의 대선배이자 60세를 넘긴 자신 앞에서도 흐트러짐 하나 보이지 않는 김좌진을 보고 이상룡은 이 젊은이가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내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김좌진은 “제가 만주로 와서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계시는 어른들을 찾아뵈었습니다. 아직 우리가 준비한 것으로 저 강한 일제를 물리칠 힘이 모자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제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일전을 치루어야 할 날이 온 것 같습니다.”하고 이상룡의 의향을 물었다. 이상룡은 그의 말에 적극 찬동하였다. 김좌진의 말대로 모자랄 수도 있겠지만 언제까지 준비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만남은 곧 길림군정사가 세워지기 전에 둘이 만났다는 것이며, 이런 의견의 일치가 곧 길림군정사의 창설로 이어졌음이 맞는다고 본다.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 조소앙의 글로 알려져 있다.
1989년, 조선일보사출판국에서 펴낸 정원택의 ‘지산해외여행일지’, 소재영편 ‘간도유랑 40년’에 의하면 길림군정사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이상룡을 비롯하여 여준, 유동열, 박찬익, 조성환 등이었다. 조성환은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이며 단체의 중심인물중 상당수가 대종교인이었다. 박환의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북로군정서’(일조각, 1991)에 의하면 ‘이 단체는 군사전략가는 많았으나 한편으로 무장투쟁을 뒷받침해 줄 대중적 기반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도 거기에 동의한다.
길림군정사는 신흥학교(아직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기 전임)에 기반을 두고 이회영 일가와 이상룡 일가의 재산을 투여한 자급적 역량으로 어렵게 인재를 양성하고는 있었지만, 만주지역 전체 동포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정부적 조직이나 군사적 조직으로는 발전하지 못한 관계로 당시 경제적으로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뒤에 서로군정서가 편성은 되지만 지청천이 지휘한 서로군정서는 사실 청산리대첩에서 활약을 보이지 못했던 이유도 무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소 거친 표현이 없지는 않지만 당시 상황을 이범석의 ‘우둥불’을 통해 확인하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홍범도씨는 의외의 큰 타격을 입고 깨달은 바 커서 나머지 무기를 지청천 장군에게 영도하는 신흥사관 생도에게 넘겨주어 장비케 함으로써 지청천 장군의 부대가 비로소 무장하게 된 것이다. (중략) 서간도에서 나와 함께 목총만으로 교육시킨 신흥학교의 도수(徒手)학생들 약 300명을 데리고 지장군은 남만으로 이동해서 백두산 밑 안도현 관하 내도산에 들어와 있었다.”
반면 북간도 왕청에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인 한 단체가 있었다. 대종교계통의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이 창설된 것이다. 대종교 지도자 백포 서일이 1911년 3월 왕청현에서 항일의병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이 3ㆍ1운동 후 대한정의단으로 변모하는데 항일무장투쟁을 이끌 군사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던 참이었다. 서일은 김좌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를 정중히 초빙함으로 마침내 김좌진은 만주 지역 최대 무장단체의 총사령관으로 발 돋음 하게 된다.
<계속> gkjh20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