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의 장계취계는 크게 세 가지조건을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구상되었다. 첫째, 중국군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린 다음 그들의 전의를 꺾어버리자. 둘째, 중국군의 체면과 영예는 최대한 유지시켜 주자. 셋째, 정치적으로 우리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고 우군화 시키도록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전 병력이 모두 군복을 착용하고, 위장용일지언정 전원 소총을 휴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48시간 안에 국방색 군복을 만들고 목총을 만들었다. 이게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관내 모든 학교의 나팔을 총 동원하고, 포수들로 구성된 포수대를 사관생도들이 지휘케 하여 중국군과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중국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보고토록 하였다.
“당초 우리의 판단은 정확했다. 교량을 놓던 일은 그네의 허장성세로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계획이었고 사실 그네의 본대는 백초구로 돌아 우리의 서북쪽 등 뒤로부터 밀림지대의 길도 없는 곳을 가로질러 전진해 나왔다.” 중국군은 예상대로 후미를 노렸고 중국군이 완전히 포위망에 걸린 것을 눈치 챘을 땐 이미 진퇴양난에 빠진 후였다.
“병력은 약 2개 대대였다. 우리는 한쪽으로 후속부대가 있는지 없는지를 정찰케 하며 비로소 입구의 산봉우리에 있는 나팔수가 우렁차게 나팔을 불어제끼고 홍백색의 수기를 든 신호수가 신호를 하기 시작했다. 건너편 산봉우리, 또 다음 산봉우리에서 나팔이 연달아 울렸다. 중국부대는 전진을 멈추고 어리둥절해서는 좌우 쪽 산을 쳐다보았다. 만산편야가 모두 독립군. 완전 포위되었음을 알았다. 망원경을 든 장교가 한참 두리번대었다. 모두가 훌륭한 장비를 갖추고 위장까지 한 것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중국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군정서의 통제에 따랐다. 이때 북로군정서 측에서도 환영위원을 앞세워 그들과 충돌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표시했다. 이범석을 앞세워 정예소대 40명의 전투력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소대장이라고 밝힌 이범석이 운남강무학당 출신임을 알고 비로소 독립군의 실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좌진을 만나게 해 줄 것을 간청하고 대면 후 사용불가 무기 몇 정을 주면 그것으로 결과보고를 하겠다는 것과 관할지역 밖으로 이동해 달라는 맹부덕의 부탁을 전했다. 이에 북로군정서에서도 소와 돼지를 잡아 그들을 후하게 접대하며 대신, 당장 이동해 달라는 조건은 거절했다. 그 결과 초비사령관 직권으로 1달간의 유예기간을 제시했고 이를 북로군정서가 수용함으로 비로소 이동에 따른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조국광복의 꿈을 실현하고자 모든 것을 불살랐던 십리평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지에서 중국군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다른, 더욱 은밀한 지역에서 안전하게 역량을 기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기도 했다. 그 외의 대안이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십리평과의 이별은 곧 청산리대첩의 영광을 실현하는 길이자 또 다른 고난과 역경의 시작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고통이 가로 놓여 있음을 왜 몰랐겠는가. 결국 나라를 잃어버린 현실은 그들을 끝없는 고통 속으로 내 몰고 있었을 따름이었다.<계속> gkjh20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