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현대그룹 고 왕 회장 ‘영원한 건설인’

2023-08-14     정수남 기자
현대건설이 1961년 9월 착공해 1965년 2월 완공한 국내 첫 수력발전소인 춘천댐. 춘천댐은 높이 40m, 제방 길이 453m, 저수량은 1억5000만 톤이다. [사진=정수남 기자]

‘호랑이’, ‘불도저’, ‘해보기는 해 봤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대표하는 말이다.

그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주도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나 훈장이던 할아버지 밑에서 4서 3경을 깨우쳤다. 그러다 그는 통천송전소학교를 졸업하고, 가난이 싫어 가출한다. 도시에는 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첫번째와 두번째 가출은 실패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16세때 아버지가 소를 팔아 가져온 70원을 훔쳐 다시 세번째로 가출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귀가한다.

그가 마지막인 네번째 가출에 성공하면서,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빨라졌다. 고향 친구 오인보에게 기차 삯을 밀려 서울로 온 그는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러다 그는 쌀집 종업원에서 쌀집 사장으로, 자동차 정비소인 아도(ART의 일본식 발음)서비스 사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해방이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렸다. 그는 1947년 5월 현대토건사(현 현대건설)를 서울 초동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마련했다.

우리나라 건설업의 태동이다.

고 정 명예회장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지로 사력댐인 소양강댐을 건설했다. [사진=정수남 기자]

고 정 명예회장은 1950년 1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발족했다.

합병 6개월 만에 6.25가 발발하고, 1953년 7월 휴전 이후 현대건설은 날았다. 전후 복구사업 덕이다.

현대건설이 국내 주요 교량부터 발전소, 고속도로 등을 잇달아 건설했다.

현대건설이 1961년 9월 착공해 1965년 2월 완공한 국내 첫 수력발전소인 춘천댐은 높이 40m, 제방 길이 453m, 저수량은 1억5000만 톤이다.

이어 현대건설은 소양강댐도 지었다.

당시 일본공영과 정부가 소양강 댐을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짓기로 한다. 이는 일본이 자국의 시멘트와 철근 등을 팔기 위한 꼼수였다.

반면, 고 정 명예회장은 부족한 물자를 대신해 댐 부지 인근에 지천인 자갈과 모래를 통한 사력댐 건설을 추진한다. 당시 일본공영 측은 건설의 무지한이라고 고 정 명예회장을 폄하했지만, 고 박정희 대통령은 고 정 명예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포병 출신인 고 박정희 대통령이 전쟁시 사력댐은 포 공격에 피해를 최소화 할수 있다고 해서다.

관광객이 소양호를 질주하고 있다. [사진=정수남 기자]

이후 고 정 명예회장은 1968년 말부터 1970년 7월에 걸쳐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도 건설했다. 이 역시 독일을 방문한 고 박정희 대통령이 현지 아우토반을 보고 고 정 명예회장에게 건설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이후 고 정 명예회장은 1976년 세계 최대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도 수주했다. 당시 주베일 산업항은 20세기 최대 역사로 불렸으며, 공사 금액이 9억3000만달러, 우리 돈으로 4600억원 수준이다. 우리나라 첫 라면인 삼양라면 1개 가격이 1970년에 20원, 1978년에 50원인 점을 고려하면 주베일 산업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현대건설은 이를 통해 고갈한 국내 외환고를 보충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당시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향후 석유 거래를 달러로만 하자는 밀약을 체결해서다. 소위 키신저 밀약이다.

고 정 명예회장은 1970년대부터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현대조선소를 울산에 지었다. 그는 조선소를 지을 돈을 빌리기 위해 영국을 찾아, 우리 돈 500원 지폐에 있는 거북선을 들이대면서 현지인을 설득해 돈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그는 짓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배 2척을 건조해 주겠다며, 그리스 선사를 설득해 수주에도 이르렀다.

고 정 명예회장은 1960년대 후반부터는 자동차산업을 육성해 1974년 첫 국산차 포니를 만든데 이어, 1976년 중남미 에콰도르에 포니 6대를 수출했다.

소양댐 하구. [사진=정수남 기자]

다만, 고 정 명예회장은 평소 자신을 “영원한 건설인”이라고 강조했다.

1980년대 초 여의도의 33배인 아산만 간척사업 당시 총연장 6400미터의 물막이 공사 마지막 난제인 270미터를 잇기 위해 폐유조선을 활용한 데서 그는 자신의 말을 입증했다.

방조제 마지막 270미터 구간은 유속이 초속 8미터로 바위와 흙 등을 모두 쓸어갈 정도로 급류였다. 소위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는 유조선공법은 이후 외국이 배워가기도 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쌀 가게 이후로는 오로지 나라 경제만을 생각했다”고 평소 말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인물로도 정평이 났다.

1988년 올림필 유치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일이다. 이어 등장한 신군부가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자신의 정체성과 1980년 광주 항쟁 등을 각각 희석하기 위해 3S(스크린, 섹스, 스포츠) 정책을 구사했다.

이에 따라 1988년 올림픽 서울 개최를 추진했지만, 당시 정부와 시는 유치를 비관했다. 82명의 IOC 위원 가운데 미국과 대만, 우리나라 정도만 서울 개최를 지지할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이를 고려해 정부는 고 정 명예회장을 단장으로 한 민간추진위원회를 스위스 바덴바덴에 파견했다. 고 정 명예회장이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었고, 신군부에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어,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해보라는 저의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고 정 명예회장은 보름 간의 유치 활동을 통해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올림픽 서울 유치에 성공했다. 투표 결과는 52대 27.

최근 카메라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