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與·野, 중도화 전략 향방은
구한말 단발령이에 대해 면암 최익현 선생은 “내 목은 잘라도 머리는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此髮不可斷)”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대쪽같은’ 기상은 모든 선비들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정계에서는 ‘백절불굴’보다는 중용(中庸)이 더 중요시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붙인 건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지난 2012년 한나라당을 이끌던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19대 총선을 대비하여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빨간색을 도입했다.
이전 민주정의당 이래 국내 보수정당의 상징과도 같던 파란색을 버린 새누리당은 강령에서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면서 ▲성장과 복지의 공존 ▲공정한 시장경제 추구 ▲호혜적 상호공존 원칙에 입각한 유연한 대북정책 등을 명시하며 기존 보수정당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박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도 맞춤형 복지와 근로자 권익 향상, 지혁 균형 발전 등 ‘국민대통합’에 나섰으며 중도 노선 선택은 결국 대선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최근 정부와 새누리당의 경제살리기 정책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경제 위해 변하가는 여권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노동개혁은 일자리”라며 “청년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대기업과 고임금·정규직들이 조금씩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달라”고 호소했다.
기존 보수진영의 경제 정책을 대표하던 ‘선 성장, 후 분배’, 대기업의 성과가 서민에게 돌아온다는 ‘낙수효과’ 등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이는 기업인이 최소화된 최근 광복 70주년 특별사면에서도 나타났다.
심지어 노동개혁의 핵심인 임금피크제는 여당의 최대 지지층이던 50대 이상 중산층의 부를 전통적 야당 지지층인 청년·서민층과 나누자는 말과 진배없다.
새누리당의 중도화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도 이에 발맞추고 있다.
새누리당이 포기한 파란색을 도입한 새정치는 북한 목함지뢰 도발사건이 발생하자 북한군의 비무장지대(DMZ) 지뢰도발 행위 규탄 결의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결의안은 북한의 소행에 대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명백하고 중대한 도발 행위”라고 명시하며 “정전협정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정면 위반한 이번 도발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사과 및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정치는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임진각에서 현장최고위원회를 열었으며 문재인 대표는 국군수도병원을 찾아 부상장병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과거 천안함 폭침은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등 북한이 도발할 때 마다 야당이 보였던 태도와는 180° 달라진 모습이다.
중도층 끌어안으려는 여·야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는 중도화에 대해 정계에서는 결국은 중도층을 끌어들여 세력을 키우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최창렬 교수는 “새정치연합은 진보정당이 안보에 대해서는 불안하다는 인식을 불식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 새누리당은 가진 자, 기득권 편에 선 이미지를 벗어나 중도층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라며 “결국 표의 확장성을 의식한 행동”이라고 풀이했다.
덕성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진만 교수는 “(여권에서 중도화를 통해) 야권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며 “비정규직과 정규직, 기득권과 비기득권으로 나누고 균열을 내면서 의제를 선점하니 야권으로서는 괴로울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조 교수는 “이번 경제인 사면의 경우도 이를 통해 기업들이 일자리 창출이나 투자를 활성화하도록 압박하고, 이런 모습이 언론에 비춰지면 정부의 노동개혁 등이 더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선일보>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등을 거치면서 국내 여론이 북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했다고 해석했다.
결국 여·야는 정책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어졌다. 이에 여론 변화에 따라 중도화가 불가피하다면 그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 전문가는 “중도층을 끌어들이는 시도는 좋지만 정체성을 잃을 경우 기존 지지자들도 빠져나갈 것”이라며 “보수는 새누리당 외 대안이 없지만 진보진영의 경우 신당이 등장한다면 치명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이런 지적에 새누리당이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무성 대표는 노동개혁을 밀어부치며 “600만 표를 잃을 각오”라고 밝혔다. 그의 말마따나 “정치인이 표를 잃어도 좋다고 말할 정도”의 의지를 보이는 한편 방미 기간에는 한·미 동맹 강화에 집중해 ‘본진’ 지키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정치는 계속해서 중도화 노선을 걸을 경우 호남계를 주축으로 탈당·신당 창당이 우려되는 상황이며 다시 진보화 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시각이 압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