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대교 건설공사에 투입됐던 삼성중공업의 해상크레인을 예인선단 2척이 쇠줄에 묶어 경상남도 거제로 예인하던 도중 한 척의 쇠줄이 끊어지면서 묶여있던 해상크레인이 유조선과 3차례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이 때 흘러나온 원유 1만2547㎘는 순식간에 태안 앞바다를 뒤덮었다. 높은 파도와 강풍 속에서 제 기능을 잃은 방제정과 뒤늦은 오일펜스 설치 등으로 청정도시 태안군은 삽시간 검게 물든 재앙의 도시로 뒤바꼈다.
당시 전문가들은 태안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20여년이 걸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한 지 한달 새 5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매서운 바닷바람 속에서 기름덩이를 제거하는데 동참하면서 전국을 휘감은 서해안의 검은 띠 공포는 차츰 잦아들었다. 놀랍게도 5년이 지난 2012년 현재 태안 앞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푸른빛을 다시 되찾았다.
‘서해안의 기적’을 만들어 낸 국민들은 태안의 이같은 외관상 변화에 삼성-허베이스피릿 원유 유출사고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5년이 지난 2012년 12월 7일, 태안엔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여전히 울부짖는 피해자
사건 발생 5주년을 나흘 앞둔 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삼성중공업 사옥 앞에는 뜨거운 ‘불길’과 함께 한바탕 큰 소동이 벌어졌다.
서해안유류피해민총연합회(이하 연합회)가 ‘서해안 유류피해 총궐기대회’를 열고 “서해안기름유출 가해기업인 사회적 살인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국민소환에 응하라”며 꽃상여에 불을 질러 꽃상여 화형식을 진행한 것이다.

함께 자리한 국응복 연합회 회장 또한 “아름답던 서해안 앞바다는 5년 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삼성중공업의 무모한 항해로 인해 검은 바다로 변해버렸다”며 “지난 2007년에 벌어진 서해안 유류 유출사고는 삼성이 저지른 인재로 사고를 일으킨 삼성 측이 책임과 배상을 하는 것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 회장은 이어 “서해안 피해주민들은 검게 변한 바다를 살리기 위해 낮에는 생계와 전쟁, 밤에는 각종 질병과 전쟁 등을 벌이며 살아왔다”며 “그러나 삼성은 사건 발생 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활이 어려운 피해민들의 환경을 악용해 사회공헌활동이라는 미명하에 피해민을 포섭하고 주민 간의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피해자 정병순(67·여) 씨도 “삼성 측은 말로만 보상을 한다고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며 “사고 이전에 양육장을 운영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못 하고 손을 놓고 있다. 황폐해진 서해 바다를 복구하기 위해 삼성 측이 하루 빨리 보상 등 행동에 나서길 바란다”고 삼성 측에 호소했다.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그날의 사고 이후 태안군의 지역경제와 주민들의 건강상태는 심각하리만큼 악화됐다.
태안군이 집계한 관광객 수 자료에 따르면, 사건 발생 전인 2007년 태안군을 찾은 관광객은 2088만명, 그러나 올해 9월 678만명만이 이곳 태안을 찾았다. 수산물 위탁판매 역시 2007년 1만4146t에서 지난해 7354t으로 급감해 ‘관광’과 ‘수산물 판매’를 업으로 삼는 이 지역의 경제가 신음을 앓고 있다.
어디 경제뿐일까. 주민 건강도 ‘빨간 불’이 여러 차례 울렸다.
지난 2011년 12월 14일 태안환경보건센터가 공개한 ‘방제지역 주민 건강영향지표 추적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방제작업에 참여했던 주민들에게서 세포 내 유전물질이나 지질 산화적 손상지표가 높게 나타났다. 이들의 손상지표는 폐금속 광산 주민보다 2배가량 높았으며 공단 인근 주민보다는 약 3배 이상으로 드러났다.
보건센터 측은 “방제작업기간이 길수록 알레르기 증상이나 고혈압 유병률 증가 이상소견이 보인다”면서 “심한 경우 면역체계 이상을 가져오거나 암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해 유류피해 주민 614명을 대상으로 정밀검진을 한 결과, 230여명이 용종과 같은 이상 징후가 보여 조직검사를 받았고, 이 중 5명은 대장암과 식도암 등 암 질환을 진단 받았다.
태안 주민들의 경제적・육체적 고통은 곧바로 정신적 고통으로 연결됐다.
사고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주민 4명이 자살하는 등 태안 주민들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어야만 했다.
생태계 회복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주된 이유는 배상 문제가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극심한 생활고를 겪은 주민 6만7757가구를 위해 정부가 내놓은 긴급생계안정자금은 총 993억원. 2008년과 2009년에는 이들을 위해 실시된 특별공공근로사업 등으로 주민의 빈 곳간을 다소나마 채웠지만, 이후에는 그마저도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1차 보상 책임이 있는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펀드)에 따르면 11월 말 기준, 전국적으로 청구된 피해배상 건수는 2만8951건, 금액으로는 2조7751억1300만원에 달하지만 국제기금의 피해 인정건수는 4762건, 금액은 1798억8800만원에 그쳐 주민들이 신청한 배상금액 대비 피해사정 결정 금액의 비율은 6.3%에 불과하다.
이는 IOPC펀드가 2008년 1차 조사 후 피해액이 5663억~6013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과는 상반된 결과다. 삼성-허베이스피릿 원유사고보다 규모가 작았던 씨프린스호 사고 때 청구금액의 47.4%를 받은 점, 1997년 일본 나홋카호 중유 유출 때 보상 청구액의 73%, 1999년 프랑스 에리카호 기름 사고 때 60% 보상을 한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수치다.
유류 사고로 가게 문을 닫게 될 위기에 놓인 태안군 내 A횟집 주인은 IOPC펀드에 손해배상금 5000만원을 신청했지만, 펀드로부터 10만원도 채 되지 않는 배상금 통지서를 받아들었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이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까닭은 맨손어업 등 배상 청구를 위한 증빙자료가 부족한 경우가 많은 데다 사고에 따른 조업중단 기간 등을 놓고 국제기금과 정부간 견해차가 크게 상이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IOPC펀드의 미온적인 해결방법 외에도 태안 주민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곳은 단연 사고를 낸 삼성중공업이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2008년 말, ‘태안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며 법원에 선박책임제한절차 개시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유출 사건에 대한 책임한도액 및 그에 따른 법정이자를 56억3400여만원으로 산정했다.
당시 법원은 ‘해상사고는 고의나 중과실이 아니면 책임한도를 제한한다’는 상법을 근거로 삼성의 손을 들어줬지만 태안 주민들과 시민사회는 상경 집회를 여는 등 법원의 결정에 거센 반발로 맞부딪쳤다.
도의적인 책임과 국민여론을 의식한 삼성은 1000억원의 지역발전협력기금을 내놓겠다고 약속했지만, 주민들은 사고의 피해 규모 등을 고려해 5000억원 출연을 요청하면서 협상은 5년 째 답보상태에 빠져 있다.
앞서 삼성중공업 본사 앞에서 총궐기대회를 연 국응복 연합회 회장은 “피해민들이 생계의 고충과 사고 후유증인 질병으로 신음하는 동안 가해기업인 삼성중공업은 5년 간 4조3000억원이라는 당기 순이익을 내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다”며 1000억원의 기금 출연과 56억여원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는 삼성중공업의 태도를 힐난했다.
연합회가 삼성중공업을 비롯한 그룹 측에 주장하는 것은 △이건희 회장은 국민이 소환한 국회 유류특위에 출석해 국민과 피해민에게 사죄하고 피해주민을 살릴 수 있는 대책을 제시할 것, △유류사고로 인해 산화한 네 명의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사과할 것, △사고 초기 약속대로 정부 주도의 연안생태계 복원계획에 참여해 피해지역 바다의 생태계를 원상 복구할 것, △기름 유출사고로 인해 붕괴된 지역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태안에 그룹 차원의 대규모 투자를 할 것, △피해지역 발전기금 생태 환경학적 피해액과 관광객 감소로 인한 관광피해 금액을 합산해 증액을 출연할 것 등이다.
그러나 삼성중공업 측이 이들 주장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협상이 난항을 겪자 정치권이 나서 지난 7월 국회 내 태안유류피해대책특위(이하 특위)를 구성했다.
특위는 총 4번의 회의를 열어 노인식 삼성중공업 사장을 증인으로 출석시키는 등 삼성중공업의 책임이행을 강력히 촉구했다.
노 사장의 특위 출석 당시, 김동완 새누리당 의원은 “10년전 스프린스호 사건시 GS칼텍스는 5분의 1밖에 기름유출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1000억원을 출연했다”며 “삼성이 사고발생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출연금 1000억원만 내놨는데 이게 적정하냐”고 노 사장을 향해 일갈했다.
특위 의원들의 공세에 노 사장은 “삼성중공업은 외국인 투자자 지분 28%,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가 지분 5%를 갖고 있는 만큼 이들의 의사를 먼저 타진해야 한다”며 “이들은 법리적 절차에 따른 검토를 원하는 만큼 보상이 이뤄지기 쉽지 않다”고 사실상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다만 이 자리서 “정부, 피해주민,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별도의 협의체가 구체적인 보상안을 내놓으면 투자자들을 설득하기도 좋고, 여러 난제를 풀기 수월할 것”이라며 협의체 구성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특위는 지난 11월, 여야 간사와 국토해양부 차관, 피해자연합회 대표, 삼성중공업 부사장, 전문가 2명 등으로 구성한 ‘서해안유류피해협의체’(이하 협의체)를 만들고 앞서 삼성 측이 발표한 1000억원 이외에 추가 출연금 규모를 논의했다.
지난달 22일과 29일, 1~2차 회의를 마친 협의체는 삼성중공업 측이 기존 1000억원에 800억원 정도를 추가 배상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5000억원 증원을 요구한 주민과의 현격한 입장차로 현재 3차 회의가 잠정 연기된 상태이다.
특위의 여당간사를 맡고 있는 김태흠 새누리당 의원은 최근 국회방송과 가진 인터뷰를 통해 “삼성중공업은 사고가 일어난 5년 전보다 매출액은 1.6배, 순이익은 2배나 늘어나는 눈부신 성장을 했는데 유류사고 피해민들의 삶은 5년 동안 생활고에 시달리며 뒷걸음질 치는 삶을 아 왔다”며 “피해주민들이 요구하는 지역발전 출연금 5000억원은 여러 전문기관의 전문가들이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제시한 금액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삼성중공업 측에 상식에 부합하는 책임 이행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피해주민들이 5000억원 증액을 말한 것은 지난해 12월이 처음이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 당시만 해도 피해민 협의체가 즉각 구성되지 않았고, 지자체도 난색을 표명해 기금을 받을 주체가 없었다”며 “2008년 정권교체 시점에서 이 논의가 표류됐다”고 기금 출연이 늦어진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현재 기금증액 요청 뒤 협의체를 통해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관계자는 “협의체의 대화는 비공개로 진행되기 때문에 삼성중공업 측이 800억원 추가 증액을 논의했단 것은 사실무근”이라며 “기부금 출연은 회사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부적 회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한편, 제 18대 대통령직에 오른 박근혜 새누리당 당선인은 후보로서 태안을 방문했던 지난 11월 28일 유세 현장서 보상과 지역경제 활성화, 환경복원 등을 적극 지원키로 약속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 내 해결되지 못했던 삼성-허베이스피릿 사건이 박근혜 정부에서 매듭지어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사진=뉴스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