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39)
일제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대단히 심각한 사안으로 침소봉대하는 언론플레이까지 시도한다. 먼저 동아·조선 양대 민족지를 폐간시키고 친일 관제매체인 ‘매일신보’를 통해 사건의 심각성을 확대 보도케 하였다. 1920년 10월 4일자 매일신보는 ‘마적의 계통은 자세치 못하나 지나군(支那軍, 중국군)이 얼마쯤 섞여있고 일본군을 습격할 목적이었기에 배일 조선인이 있는 듯하다.’고 보도했다. 또 같은 날 조선군사령부의 발표는 ‘한국독립군이 많이 가담한 러시아인이 지휘하는 무리,(중략) 단순한 마적이 아니라 과격파와 같은 것이라 생각할 만하다.’라고 하여 독립군이 적극가담하고 중국, 러시아인까지 끌어들여 국제문제화로 확대하려 하였다.
여기에도 숨은 의도가 있었다. 독립군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했을 경우 한국은 이미 한일합병으로 일본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대외적으로 공표를 하고 선전에 열을 올렸는데, 그렇다면 자국민끼리의 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국민끼리의 분쟁인데 남의 나라에 정규군을 파견한다는 것은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때문에 중국 측의 관병은 물론 러시아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국제적인 문제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일제는 일방적으로 중국을 압박했다. 주중공사 ‘오바타’(小幡)는 훈춘사건의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중국 측에 강력한 항의와 함께 대규모 정규군파견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중국 측에서는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독립군과 마적을 토벌할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일제는 중국과 협상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해서 사건 당일 바로 병력을 침입시키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어서 일제는 10월 7일을 기해 거침없이 북간도지역으로 대규모 병력을 침입시켰다. 함북 나남(청진)에 주둔하고 있던 19사단을 주력으로 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 그리고 러시아 혁명 당시 백계군(白係軍, 짜르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시베리아 주둔 11사단, 13사단, 14사단(이들을 ‘포조군’이라 칭했다)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여기에 북만주 파견군과 관동군까지 합류함으로 2만 여명이 넘는 대규모로 토벌부대를 편성하였다. 전투근무지원부대까지 포함한다면 그 배에 가까운 병력이 이 토벌작전에 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남쪽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19사단과 20사단이 통합된 주력부대는 다시 ‘이소바야지대’(磯林支隊, 이소바야시 조꾸아께(磯林直明) 소장), ‘기무라지대’(木村支隊, 기무라 에끼미쯔(木村益三) 소장), ‘아즈마지대’(東支隊, 아즈마 히데(東正彦)소장), 직할대, 국경수비대 등 5개 지대 즉 ‘전투단’(戰鬪團)으로 나눠 혼춘, 용정, 왕청 등 북간도지방에 근거를 둔 아군독립군 부대를 공략하였다. 다음, 동쪽방향에서 간도를 공략한 일본군부대는 일찍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있던 ‘포조파견군’(浦潮派遣軍)인 11사단의 ‘스치가도지대’(土門子支隊), 13사단의 ‘하이리지대’(羽入支隊) 등이었다. 북방으로는 이미 이전부터 북만주에 파견되었던 ‘아베지대’(安部支隊)를 중심으로 기관총대 4개, 기병 1개 소대가 편조를 이루어 공격해왔으며 서쪽에서는 1919년 4월에 도독부가 폐지되고 사령부가 설치되어 주둔하게 된 ‘관동군’(關東軍) 제 19연대와 20연대가 서간도에 해당하는 무순, 흥경, 통화, 환인, 관전, 안동, 유하 등을 향해 침입했다. 일제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특히 한반도에서 두만강을 건넌 19, 20사단과 포조군 2개 사단병력 등 주력군을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북간도 독립군 공격에 집중시켰다.
일제의 교활함과 만행을 견제할 국제적 역학관계가 존재하지 않던 간도지역의 무기력이 적나라하게 노정된 현상이었다. 일제를 피해 간도지역으로 들어 온 우리 독립군은 물론 동포들이 기댈 언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라 잃은 설움의 차원을 넘어서는, 참담함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우군이라 여겼던 중국은 허울뿐인 나라요, 친일노선으로 연명하던 동북군벌 장작림은 독립군에게 신경 쓸 여력도 그럴 맘도 없었다. 결국 이제 일본군과의 교전시각이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길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