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靑山里). 이름만 들어도 ‘아, 우리 동포마을이구나!’를 직감하게 되는 지명이다. 청산리로 향하는 길은 폭은 넓으나 비포장도로이다. 화룡시내의 서남 끝자락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비포장 길을 들어서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하나는 저수지(靑山水庫)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청산리로 가는 길이다. 원래는 이 삼도구 골짝의 이름이 ‘청산리골짝’이였다. 다시 말해 청산리는 한 동리의 명칭이 아니라 지금의 삼도구 골짝 전체를 일컬어 부르던 지역명이다. 지금은 1932년에 다시 재건된 현재의 ‘청산촌’이 그 골짝의 이름을 사용
“나는 시베리아에서 조성환 선생이 보내 온 러시아 코작크 기병이 타던 좋은 말을 타고 마음 껏 내 달릴 수 있었다. 현 부총재는 노인으로서 말을 달릴 형편이 못되었다. 더구나 회봉(晦峰, 이정의 호)은 평소에 몇 번 말을 타본 경험조차 없었고 게다가 늙어서 걷지 못할 말을 골라 탔기 때문에 행진이 늦어졌다.”이 회합에서의 결론은 피전책(避戰策)이었다. 누구보다 강력하게 피전책을 주창한 사람은 현천묵이었다. 일제의 기록이다. 일제가 어떻게 이런 정보까지 다 수집하여 기록할 수 있었는지, 또는 보안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그리고 일제의
‘묘령’(廟嶺)은 현재 화룡시 부흥향 흥서촌 소속으로 화룡시에서 보면 북쪽으로 완만한 언덕처럼 된 산줄기가 횡으로 보이는데 그 고갯길이 묘령이고 고갯길의 남단에 위치한 마을이 ‘묘령촌’(廟嶺村)이다. 묘령은 마을 뒷산에 옛 사당이 있어 묘령이라 불렀다. 중국에는 동북지역만 하더라도 고갯길 부근에는 묘령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수없이 많다. 고갯길을 무사히 지나게 해달라는 기원일 수도 있고 높은 곳에 신좌를 두는 민간 신앙적 요인도 작용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성황당 정도로 봐도 무관하다. 현재 묘령촌은 아직도 그 지명을 그대로 사용
일제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대단히 심각한 사안으로 침소봉대하는 언론플레이까지 시도한다. 먼저 동아·조선 양대 민족지를 폐간시키고 친일 관제매체인 ‘매일신보’를 통해 사건의 심각성을 확대 보도케 하였다. 1920년 10월 4일자 매일신보는 ‘마적의 계통은 자세치 못하나 지나군(支那軍, 중국군)이 얼마쯤 섞여있고 일본군을 습격할 목적이었기에 배일 조선인이 있는 듯하다.’고 보도했다. 또 같은 날 조선군사령부의 발표는 ‘한국독립군이 많이 가담한 러시아인이 지휘하는 무리,(중략) 단순한 마적이 아니라 과격파와 같은 것이라 생각할 만하다.
그렇게 사흘에 걸쳐 준비한 겨울 보급품을 챙겨서 이동한 곳은 화룡현 삼도구(三道沟) 북쪽, ‘묘령’(廟岺)부근의 서쪽 오지였다. 그리고 일본군 토벌대가 전개됨에 따라 청산리부근으로 이동하였다. 10월 18일 현재, 일제의 정보에 의하면 당시 북로군정서는 약 600여명의 병력이 십리평에 주둔하고 있었다. 십리평과 청산리가 위치한 삼도구 일대는 대종교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북로군정서의 입장에서는 왕청현 일대 못지않게 대중적 지지기반을 획득하기 용이한 지역이었다.따라서 김좌진의 생각으로는 싸워야 된다면 이 지역이 가장 유리한 장소가
십리평에서 하룻밤을 묵은 북로군정서는 다시 남쪽으로 행군해 갔다. 장인을 거쳐 계곡을 벗어난 행군대열은 ‘와록구’(臥鹿沟)에 도착했다. 와록구는 현재 ‘와룡촌’(臥龍村)내의 ‘만리구’(萬里沟)다. 이때가 10월 10일경이다. 이곳에서 3일을 지체하며 동계피복과 군량미를 준비했다. 그랬을 것이다. 지금이야 허물어져가는 집이 도처에 보이는 한적하고 낡은 촌락이지만 과거의 와룡은 ‘화집구(華集沟)골’과 ‘봉밀하’(蜂蜜河)가 만나는 곳으로 큰 마을이었고 지금도 소학교가 존속하는 중심지이다. 인근의 들판을 보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몇 끼 분
십리평도 역시 동포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북로군정서의 숙영지역은 전부 동포마을이되, 하천을 끼고 있는 곳이었다. 일본군의 기록대로 치더라도 최소 600여명의 장정들이 씻기도 하고 먹기도 하려면 그런 지역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 주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십리평도 그런 곳이다.그런데 지금의 십리평 들판에는 전답이 거의 없다. 죄다 버섯농사를 짓는 모양이었다. 하다 보니 수확 후의 들판은 온통 비닐과 쓰레기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바람도 피할 겸 마을의 작은 가게에 들어갔더니 온 마을
차조구를 출발한 북로군정서는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화룡(和龍)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천보산을 넘어 ‘십리평’(十里坪, 십리평이란 지명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왕청의 북로군정서 사령부가 있던 십리평은 물론, 화룡에만 하더라도 장안진의 십리평과 청산리 지역의 십리평이 각각 존재한다.)으로 향했다. 화룡은 산곡이 많은 곳이자 백두산의 연선 초입이다. 화룡에서 시작하는 울창한 삼림은 백두산까지 이어지고 이 길을 통해 백두산지역으로 들어가거나 화룡의 어느 깊은 지역에 밀영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이 독립군들의 최초계획이기도 했다.중국 동북지역의
이런 각종 마적들의 발호는 거의 중국 전역에 걸쳐 일어 난 현상이지만 동북지역이 특히 심했다. 이들 무리가 바로 소위 ‘만주벌판 마적’들이다. 이들과 독립군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기도 하고 혹은 우호적 관계를 도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과 공존을 모색하며 항일전선에 나서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아무튼 에피소드처럼 보이지만 북로군정서가 이 지역에서 마적단과 교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이곳의 지형을 보면 천보산의 한 자락인 오봉산이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 마적들이 은거하기에는 대단히 양호한 지형이었다. 북로군정서에게도 덤빈
북로군정서는 10월 4일 금불사 지역에서 ‘차조구’(茶条沟)로 이동해 왔다. 금불사 일대에서 불상사도 있었고 부상자에 대한 치료, 사건의 뒷수습 등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병력은 충분히 정비를 한 후의 이동이었다. 차조구는 지금의 ‘안도현 석문진’(安圖縣 石門鎭) 소재지다. 이곳의 원래 지명이 ‘토문자’(土門子)이고, 안도현 지명지에 의하면 1906년에 마을이 들어섰다. 이범석이 집결지라고 말한 ‘토문자’(土文子)가 바로 차조구다. 한자 명칭으로는 이범석의 착오다. 필자는 금불사에서 차조구로 바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날, 정찰과 탐문을 한 결과 그들이 동불사 ‘현막골’이란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김좌진은 김규식 통솔 하에 이범석 등 보병과 연성대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범석에 의하면 “최초 무장해제 정도의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한다. 아마 김좌진도 김규식을 보낸 이유가 젊은 혈기만을 앞세운다면 틀림없이 무력충돌이 발생할 것이라 판단하고 원로급인 김규식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했을 것이다.물론, 구춘선에 대한 예의도 고려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러나 현실은 처음부터 꼬였다. 북로군정서군이 현막골 산등성이를 돌자 국민회군이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김좌진이 거느린 군정서부대 약 600명이 9월말에 등불사 북골에 머물렀다가 10월초에 차조구를 지났다’고 되어 있다.(간도정보 제 59호, 1920년 11월 10일, ‘10월에 얻은 정보에 근거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행동개황’) 팔도구에서 숙박을 했으리라 추측을 해보면 9월 24일~25일 경에 북로군정서는 동불사(銅佛寺) 북촌에 도달했으리라 판단된다. 동불사 지역은 원래부터 북로군정서의 관할구역이었다. 진중일지 8월 17일자 내용에도 “나 군의(羅 軍醫, 나병호 군의관)는 약재를 구입하기 위하여 동불사 방면으로
신흥동에서 숙영을 한 북로군정서는 ‘춘흥’(春興)을 지나 본격적으로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제부터는 도로도 만만찮다. 지금도 ‘연하저수지’(延河水庫) 수문을 지나면 비포장도로다. 여기에서 ‘연통(煙筒)바위’ 아래를 지나 ‘석인구’(石人沟)를 거치고 석인구에서 고갯길 두 개를 넘어 ‘팔도구’(八道沟)에 도착한다. 보통 거친 길이 아니다.이 길은 오르막의 연속이다. 지금은 연하저수지가 생겨 차 두 대가 비좁게 비켜 갈 정도의 도로가 나 있지만 그 당시, 도로도 변변찮았을 이곳에 소 수레까지 끌고 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춘
진시구에서 모처럼 고기국물로 속을 덥힌 북로군정서는 별빛을 등촉삼아 북서방향으로 이동했다. 대열은 ‘남양촌’(南陽村)을 지나 ‘연집강’(煙集岡)에서 ‘의란하’(依蘭河)를 건너 ‘신흥동’(新興洞)에서 도착하여 비로소 몸을 누일 수 있었다.남양촌은 개암나무골에서 서쪽으로 약 6Km 쯤 떨어진 곳에 있다. 연길에서 도문과 왕청으로 가는 도로가 갈라지는 곳이다. 즉, 연길에서 도문으로 가다 좌측으로 왕청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갈림길에 남양촌이 있다. 지금은 의란진 ‘신광촌’(新光村)에 속한 마을이다. 이곳에서 의란진소재지까지는 10Km 남
1920년 ‘경신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의 승리로 대일 항쟁의 서광을 비춰준 영광의 해지만, 한편으로는 독립군 토벌에 실패한 일제가 독립군의 근원을 말살하기 위해 가한, 북만주 최악의 만행을 저지른 참혹한 해이기도 했다. 그 피해의 산 증거이자 현장이 진시구다. 개암나무가 많아 진시구라는 이름을 얻은 민족의 땅. 가을, 개암나무 열매가 검붉게 익을 때면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개암열매를 따 먹느라 이 기슭 저 기슭을 뛰어 다니며 왁자지껄했을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아픈
북로군정서는 9월 21일 아침 8시에 위자구를 출발하였다. 전 날 모진 행군 탓에 대원들이야 모처럼 깊은 잠에 빠졌을 것이다. 경계병은 물 흐르는 소리와 물결에 몸을 부비는 갈대소리를 들으며 고향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 시간 김좌진의 머릿속은 복잡하지 않았을까? 지도를 펼쳐 놓고 이동로를 다시 확인하며 이동로 상에 있는 조선족마을을 파악하고 큰 강과 험지를 피하되 최상의 행군로를 선택하기 위해 아마 쪽잠조차 자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지역출신 대원들을 불러 현지 사정도 파악했을 것이고 전초나 호위대의 위치선정에도 고심했을 것이다.
야밤, 찬바람이 스며드는 가을의 어둠 속에서 북로군정서는 잠을 설친 가운데 남쪽으로 행군을 개시했다. 쫒기 듯 떠나는 대오는 말없이 어둠속을 걸었을 것이다. 대개 야간행군은 굳이 기도비닉(企圖秘匿)을 기하라는 지침을 내리지 않아도 말이 없어진다. 본능적으로 침묵 속에서 행군을 하게 되어 있다. 어두움 속에 소총과 탄띠, 군장이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만 불규칙하게 들릴 따름이다. 그날 침묵의 행군로에서 당시 북로군정서 대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일본군 기록에 의하면 ‘가야하’의 상류지점인 ‘용부촌’(龍部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고 되어
따라서 여기서도 짚고 넘어가야 되는 부분이 있는데 북로군정서와 대한광복단이 독자적이고 별도의 군사행동을 했다기보다 독자적 조직은 갖되, 상호 연계 내지는 연합한 단체로 봄이 옳을 것이다. ‘복벽’(復辟)과 ‘공화’(共和)라는 이념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항일 민족주의적’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충분히 협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지역에서 함께 주둔하고 연합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이 이범윤의 행적과 오히려 일치되는 해석이 된다. 아무튼 대감자 역시 1920년대 왕청 일대가 독립군들로 붐볐듯, 같은 분위기였음은 확실한 곳
암흑을 헤치고 북로군정서의 행군은 시작되었다. 흑웅동에서 ‘대감자’(大坎子)에 이르는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그리고 넓은 평야는 아니더라도 한마을은 거뜬하게 먹여 살리고도 남을 농토가 길게 펼쳐진 곳이다. 이 시기 벼는 누렇게 익어가고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기 전임으로 행군에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서늘한 가을바람이 한밤의 어둠속으로 스쳐지나갈 때는 행군하기에 더 좋은 조건을 제공했을 게다.대감자는 북로군정서로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도문에서 왕청에 이르려면 가야하를 거슬러 신흥하를 타고 오르면 넓은 강기슭을 벗어나 들을 만나는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