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43)

청산리골. 송월평에서 백운평에 이르는 지역을 통칭 청산리골이라 불렀다.
청산리골. 송월평에서 백운평에 이르는 지역을 통칭 청산리골이라 불렀다.

 

마침내 전쟁은 현실이 되었다. 북로군정서 총재부가 피전책을 제기한들 이미 정황은 교전이 불가피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일제는 시시각각 추격과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김좌진의 움직임까지도 첩보수준을 넘어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역시 적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에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10월 19일 밤에 아군은 송리평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60리 되는 싸리밧촌에 도착하여 몇시간의 잠을 청하고 있던 중 적군 200명은 평양촌(송리평 상촌이니 피아의 거리가 20리)까지 쫒아들어왔소. 아군은 싸리밧촌에서 한때의 식량을 준비하여 청산리 산림속에서 20리를 몰래 행군하여 산림중에서 하룻밤을 노숙하고 다음날(즉 20일)에 이르러서는 휴대하였던 식량이 다하였으므로 그날은 굶게 되었소. 적은 벌써 싸리밧촌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자. 김훈이 상술한 지명은 송리평, 싸리밭촌, 평양촌, 송리평 상촌, 청산리산림이 나온다. 최종위치는 ‘청산리 산림이다. 그러나 전장은 분명히 백운평이었다. 도대체 청산리 산림은 어디를 지칭하는 곳인가? 당시 북로군정서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전투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청산리대첩’을 왜 청산리라 부르는지 그 단초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훈이 말하는 송리평은 지금의 송월촌을 말한다. 원래의 이름은 ‘송림평’(松林坪)이다. 부대가 송림평에 있을 때 김좌진과 사령부는 ‘라월평’(羅月坪)에 있었다. 라월평은 송월평과는 약 2~3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점차 마을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하나로 합쳐져서 지금은 송월평으로 통합되어 있다. 김훈은 19일 밤에 송림평을 떠나 60리를 가서 싸리밧촌(싸리밭촌의 오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싸리밭촌은 평양촌과의 거리가 20리라고 했다. 한국식 거리로는 약 8km라는 말이다. 이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 당시의 마을을 다시 확인해 봐야 된다. 송월평에서 청산리계곡을 따라 해란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에는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평양촌, 싸리밭촌, 백운평 등의 마을들이 있었다. 청산리란 마을은 없었다.

송림평에서 라월평까지는 3.5km, 라월평에서 십리평까지는 약 2km, 십리평에서 평양촌까지는 약 3km, 평양촌에서 싸리밭촌까지 약 2.5km, 싸리밭촌에서 백운평까지는 약 3km이다. 그렇다면 김훈이 말한 송림평에서 싸리밭촌까지의 거리가 60리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청산리 산림도 지금의 지명에 대입해 보면 당치 않는다. 산골과 계곡을 지나는 행군과 험로로 인해서 김훈이 체감하기에는 그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해서 당시의 마을을 기준으로 추정해 볼 수밖에 없는데 필자의 수차례 답사의 결론은 옛 지명을 토대로 추정하는 것이 가장 명증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북로군정서는 삼도구의 청산리북구에서 갈라지는 그 아래의 백운평(약 5,60호 되는 부락)부근에 주둔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청산리 북구라는 곳은 현재 청산촌 서쪽에 있는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가르킨다. 현재 백운평쪽으로 가는 길이다. 예전 이 골짜기로 약 2km쯤 더 가면 북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5년 전까지 1가구가 터밭과 인근에 옥수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빈집만 남아 있고 사람은 살지 않는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김춘선에 의하면 이 북골을 ‘나무가리’(樹干雜)라 하였다. 나무가리 서쪽에 있던 마을이 증봉리이고 증봉리가 바로 청산리라고 하였다. 한편 연변박물관 김철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의 평양촌은 지금의 청산촌에서 서쪽으로 1km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청산리는 이 북골의 동쪽에 있었고 아랫마을은 청산리라 하였는데 후에 두 마을이 점차 잇닿자 같이 청산리라 불렀다는 것이다. ‘화룡현지명지’ 역시 그렇게 밝히고 있다. 이것이 1932년의 사료다. 그러니까 김좌진이 병력을 이동시킨 당시에는 청산리라는 마을은 없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청산리는 마을 이름이 아니고 계곡이름이었고 지역명이었던 것이다. 해서 김훈도 ‘청산리산림’이라 지칭한 것이었다.

라월평일대.북로군정서가 1차로 진지를 편성 점령했던 곳. 
라월평일대.북로군정서가 1차로 진지를 편성 점령했던 곳. 

현재의 청산촌(청산리대첩 기념비)을 탐방해 보면 청산촌 즉 청산리골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두 갈래 길이 갈라짐을 알 수 있다. 이 삼도구를 적시는 하천이 바로 ‘해란강’(海蘭江)인데 해란강의 원줄기 두 개가 합수되는 지점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북골이고 남쪽으로 향해 있는 골이 백두산을 향하는 남구이다. 남구 쪽으로는 갈일이 없던 필자도 답사단을 인솔하며 종종 질문을 받곤 했다. 저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냐고. 장산령을 넘어 백두산으로 향하던 길은 현재 임장(林場)으로 쓰이고만 있다. 평양촌은 세 갈래 길의 첫 마을이었다. 평양촌이라 불렀던 이유는 평안도 평양사람들이 많이 살아 그렇게 명명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청산촌에서 1~2km 정도 기슭을 타고 올라가면 넓은 개활지가 나오는데 거기가 옛 평양촌이다. 지형으로 봐도 현재의 청산촌 위치보다 훨씬 부락이 앉기에 적합하다. 넓어서 부대가 주둔하기에도 좋다.

그렇다면 ‘싸리밭골’은 어디 쯤 있었을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김춘선이 비정한 증봉리 일대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답사 시에 청산리골에서 마을이 있을 수 있는 지형과 병력이 숙영할 수 있는 지형, 그리고 구체적으로 백운평전투를 치룬 진지위치 등을 각종 연구서, 이범석 자전,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 등을 참고로 비교 확인해 본 결과 내린 결론이다. 이곳은 옛 평양촌에서 2~3km 정도 서쪽으로 올라가서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물론 지금은 도로도 인가도 없다. 이곳에서 ‘베개봉’(枕峰山)이 가장 잘 보여 증봉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운평전투 후에 백운평마을은 일제에 의해 폐허로 변했고 싸리밭골은 청산리골짝 마지막 마을이 되었다. 그런데 김훈에 의하면 이곳에 도착하여 몇 시간 휴식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20리 정도 떨어진 평양촌으로 들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20리면 8km다. 8km 정도 떨어져 있을라치면 거의 직소택 부근까지 가야된다. 계곡 길 20리면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그러나 1~2km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마 평양촌에 파견한 정찰대나 편의대의 첩보에 의해 삼도구로 일본군 200명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평양촌에 들어 온 것으로 와전 된 듯 보인다.

십리평촌. 기울어진 마을 이정표처럼 해가 갈수록 마을이 쇄락해 가고 있다.  돌에 새겨진 십리평촌마을 알림판이 오른쪽에 보인다.

그러나 일본군이 가까이 다가 온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김좌진은 첫 번째 전투인 백운평전투를 위해 직소택 아래 직경사의 사면에 병력을 배치하고 적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마침내 청산리 대첩의 서막이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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