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44)

청산리골의 끝 지점인 ‘직소택’(直沼澤) 부근까지 병력을 물린 김좌진은 사전 지형정찰을 마쳤다. 그리고 청산리 골의 지형적 특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계곡은 넓었다 좁았다를 반복하고, 계곡을 향해 뿌리를 내린 산등은 구불구불한 계곡 길을 만들었다. 증봉리나 백운평지역을 제외하고는 바위와 엉킨 물길 뿐, 마을을 이어주는 우마차 1대 정도의 소로 외에는 이동도 불편했다. 아군의 이동도 힘들었지만 적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길도 한 곳 뿐이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남쪽으로는 베개봉을 휘도는 침봉산이 가로 막혀 있고 북쪽으로도 거의 4~50도 경사의 산 사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선점만 한다면, 적들이 오기만 한다면 무조건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더욱이 삼림은 울창하여 기도비닉만 유지 한다면 적이 아군을 발견하기가 여간 힘든 곳이 아니었다. 아군끼리 조차 맞은 편 능선에 진지를 구축한 아군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직소택이 만들어 내는 폭포소리는 어지간한 아군의 잔기침쯤이야 감추고도 남았다. 그 곳에서 적을 맞기로 했다.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 내용이다. “양호한 진지를 점령하니 그 좌측은 산림이 울창한 약 80도의 급경사지고, 우측은 암석이 험준한 100m의 높은 산지가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보병 1대대는 본대가 되고 여행단은 후위가 되어 이범석씨가 인솔 임무를 맡고, 후위 첨병은 이민화씨와 본인이 각각 군인 5명을 인솔하고 이 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민화씨는 골짜기의 본길의 전방 즉 60도 경사진 중턱에서, 본인은 이 계곡의 왼쪽 90도 낭떠러지인 고지에서 적을 맞게 되었었소.” 진지편성은 끝났다. 이제 적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백운평을 적시던 해란강 상류.
백운평을 적시던 해란강 상류.

직소택 채 못 미쳐 자리한 청산리골 계곡은 전방으로는 직소택을 향한 급경사의 고갯길이, 좌측으로는 김훈 말대로 60도의 경사면이, 우측으로는 거의 90도에 가까운 급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계곡, 즉 일본군이 접근했던 곳으로는 도로가 없다. 현재의 도로 위에서 바라보는 경사도도 아찔하다. 그리고 백운평을 지나 좁은 계곡을 휘돌아 나오면 다소 넓은 지형이 나오고 그 넓은 지형이 직소택을 향해 다시 외길로 좁아지는데 바로 그 지점이 백운평전투 현장이었던 것이다.

백운평은 북로군정서가 휴식을 취했던 싸리밭골에서 직선거리로 3km정도 떨어 진 마을이다. 베개봉(1676.6m)을 머리에 이고 맑은 직소의 물을 마시며 산중턱의 골짝에 집들을 얹고 살았던 곱디고운 산골마을이었다. 장백산맥의 남강지맥(南崗支脈)의 한 켠에 자리한지라 산세가 험하여 남북은 산으로 병풍을 둘렀고, 동서로 겨우 물길이 지날 수 있을 만치의 길이 열려 있을 뿐인 곳이다. 그래서 일까? 1920년 당시 청산리계곡의 조선인들은 거의가 평안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유독 백운평에만 길주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길주는 함경산맥과 마천령산맥이 교차하는 산곡지형이다. 그것도 백운평과 비슷해서 서북에서 동남방향으로 지구곡이 형성되어 있다. 겨울철 평균기온이 영하 10도다. 고향땅과 진배없는 곳이란 생각들도 했을 터이고, 조상들의 땅이나 크게 다르지 않는 이 산골이 오히려 간섭받지 않고 편안했을 수도 있다.

백운평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의 현재 모습.
백운평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의 현재 모습.

백운평이란 이름만으로도 신선이 살았던 곳 같은 느낌을 준다. 백운평은 물안개가 끼었다가 또 어떤 날은 희구름같은 안개가 낀다하여 백운평이라 불렀단다. 아닌게 아니라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는 구름이 계곡을 채우고 있는 그곳에 백운평이 있었고 아랫동네 사람들은 흰구름이 머무는 동네로 보였을 것이다. 베개봉 서북쪽의 1,500고지와 1496고지 사이에 있는 노리극(老里克, 로리커) 소택지에서 발원하는 해란강은 백운평마을 서쪽 10리 못 미치는 곳에 이르러 직소택이라는 폭포 한줄기를 시원스레 쏟아 내고 산꿈치를 핥으며 동쪽을 향해 폭을 넓혀간다. 백운평 앞의 해란강은 마을 앞 개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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