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45)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백운평의 상징 직소택은 청산리계곡에서 산세가 험하기로 으뜸이다. 지금도 나무가 울창하여 아래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나뭇잎이 다 진 겨울에도 그러할 진데 아직 나뭇잎이 남아 있는 가을이나 여름은 말해 무엇하랴. 직소택부근의 남북 양쪽의 경사도는 60~70도가 족한 급경사다. 지금은 골짜기 북쪽 산중턱에 안도방향으로 가는 도로가 닦여 있는데 이 도로가 1935년에 일제가 만든 군용도로다. 인적이 없어 차량이동이 안 될 만큼 도로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예전 1920년 당시에는 험한 산을 피해 계곡옆으로 도로가 하나 있었는데 소수레나 하나 다닐 정도였다. 사람이 다녀도 왕복으로는 비켜서야 되는 폭이었다. 그렇게 고갯마루에 서면 만나는 높이 3미터의 시원한 폭포가 소(沼)를 만드는데 직소택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일제가 군용도로를 닦고 목재를 운반하느라 이곳을 폭파시켜 버렸다. 지금은 3m 높이의 폭포는 간데없고 다만 그 짜투리 흔적이 남아있다. 힘들게 허우적대며 청산리계곡을 오르다 보면 산모퉁이를 도는 고갯마루가 보일 때쯤 해서 몇 번의 각을 꺾어가며 바위 사이를 가파르게 낙하하는, 청류 한줄기가 만들어 내는 시원한 풍경을 만나게 되는데 소나무 사이로 비켜 그 모습은 청산리계곡의 이름값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직소택에서의 필자.
직소택에서의 필자.

연변박물관 김철수는 청산촌 마을의 조춘봉(1911년생)이라는 노인과의 취재기를 남기고 있다. 노인은 경신년에 일본군이 직소에서 몰살되었다고 증언한다. 조노인은 증봉리태생으로 열네살에 부흥촌으로 이사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증봉리로 돌아 온 후 청산리로 이사하여 그때까지 살아 온 청산리계곡의 산 증인이었다. 그는 청산리계곡의 구석구석을 자기 손금보다 더 훤하게 꿰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30년대 초에 일제가 군용도로를 닦기 전 직소는 낙차가 8~9m나 되는 폭포였고 소의 깊이는 허리를 넘겼다. 그런데 일제는 군용도로를 내며 길 양쪽으로 폭 200m 안에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또, 목재약탈에 혈안이 되어 이곳의 재목을 채벌하여 해란강에 뎃목을 띄우게 하였는데 뗏목이 이곳에서 걸리게 되자 그나마 붙어있던 바위들마저 폭파해 버리고 바닥에 통나무를 깔아 임도를 만드는 바람에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일제가 청산리계곡의 나무를 모조리 채벌하는 바람에 청산리계곡은 벌거숭이산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울창한 나무는 그때 채벌하는 가운데도 씨를 뿌린 애목들이 자란 것이었다.

백운평 전투에서 한근원 제대의 진지에서 바라본 일본군 이동로.
백운평 전투에서 한근원 제대의 진지에서 바라본 일본군 이동로.

직소태은 청산리계곡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봄이면 봄나물을 캐던 계집아이들의 무리로 고왔고, 여름이면 천둥벌거숭이들의 물놀이터였다. 그러다 섬뜩한 것을 줍기도 했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주워 놀았다. 그게 일본군의 정강이 뼈였다. 어른들게 이뼈가 무슨 뼈냐고 물어보니 독립군들에게 죽은 왜군의 뼈라고 해서 바위에 두들겨 보기도 하고 전쟁놀이 도구로 가지고 놀기도 했다. 그곳을 일제는 마을도 없애고 놀이터도 없애 버렸다. 조용한 은둔을 택해 들어왔던 길주인들의 마을 백운동을 제일 먼저 흔적도 없이 파괴했다. 전쟁을 피해 흩어졌던 젊은 축은 다시 집으로 돌아 올 수 없었고, 내 손으로 일구어 겨우 정붙이고 살만한 동네를 차마 떠날 수 없었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네들은 앉아서 죽임을 당했다. 백운평은 그렇게 승전에 방점을 찍는 역사적 이름으로 남지만 동네는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 이범석도 ‘우둥불’에서 송림평부터 우리 동포들을 대부분 데리고 이동하였으며 단지 남게 된 것은 노인들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10여년 뒤, 일제의 임장이 들어서자 왜군 뼈를 가지고 놀던 아이들이 자라자 산판에 동원됐고 청산리골의 마을들은 약탈당했다. 총성 울리던 청산리계곡은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모진 악연이다.

김좌진과 북로군정서가 숙영했다는 공지는 백운평 마을이 있었던 곳에서 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2km 정도 올라가면 만난다. 공지라고 해봐야 동서길이 약 100m, 남북으로 너비 50m 정도되는 그리 크지 않은 곳이다. 해란강은 이 공지의 중간으로 흐르고 있는데 차가 통할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 있었지만 필자가 답사를 갔을 때는 지난여름 큰물로 떠내려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 지금도 장마철이면 해란강은 사람 키를 넘기는 유량을 쏟아 낸다. 거기에서 1km정도를 더 올라가면 직소택이다. 필자가 찾은 청산리골은 11월초인데도 눈이 쌓였고 햇살과 무관하게 찬 골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청산리골 일대를 뒤흔든 총격소리는 깊은 골을 타고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 날의 격전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gkjh2004@naver.com <계속>

저작권자 © 팩트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