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46)

비록 현천묵의 주장대로 피전책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김좌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미 의지도 다졌고 계책도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피전토록 진행되지도 않았다. 이제 적을 어떻게 괴멸시키느냐의 전술적 방책을 강구하는 일만 남았다.

직소택 아래 계곡은 청산리골 중에서도 가장 폭이 좁고 양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경사지로 이루어져 있어 매복진지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김좌진은 제대를 둘로 나누었다. 제1제대는 김좌진이 직접 지휘를 하여 직소택을 둘러싸고 ‘사방정자’(四方頂子)의 산기슭에 배치하고 2제대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좌우 절벽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투 후 2제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1제대의 위치를 좌전방에 두어 최대한 시야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첨병을 각각 2대 조로 나누어 최전선에 배치하여 후방에서 공격하게 했다. 이를 위해 우측 산허리 1개 중대는 이민화가, 좌측 산허리 1개 중대는 한근원이 지휘하게 하고 정면의 우측 1개 소대는 김훈이, 좌측 1개 소대는 이교성이 담당하게 했다. 이로써 그물망처럼 진지편성을 완료했다. 이날이 10월 20일 밤이었다. 음력 9월 아흐레, 상현달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 적을 기다리며 김좌진의 비서 이정이 읊었다는 오언절구가 이범석의 우둥불에 남아있다. ‘나뭇잎새 떨어져서 산 모습 조용하고(木落山容靜), 하늘이 높아뵈니 달빛 더욱 밝으라(天高月影肥), 장사의 마음 속은 말 무리가 달리는데(壯士意萬馬), 날 새길 기다리자니 밤이 이리 길고나(待旦夜漫長).’ 달그락거리는 진지 배치 소리와 눈앞에 있는 적을 기다리며 첫 전투를 목전에 둔 팽팽한 전선의 긴장감과 소소한 가을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듯하다.

일제가 만든 군용 도로.
일제가 만든 군용 도로.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에는 당시의 배치를 이렇게 전한다. “우리의 보병 1대대는 본대가 되고 여행단은 후위가 되어 이범석씨가 인솔 임무를 맡고, 후위 첨병은 이민화씨와 본인이 이 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민화씨는 골짜기의 본길 전방 즉 60도 경사진 중턱에서, 본인은 이 계곡의 왼쪽 90도 낭떠러지인 고지에서 적을 맞게 되었었소.” 김훈이 위치한 진지의 맞은편에 이민화의 중대가 있었기에 김훈의 기술은 2개 제대만 기술하고 있다. 실상은 5개 제대로 진지를 편성했다.

당시 일본군은 북로군정서가 청산리계곡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병력을 급히 청산리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조선군사령관(일제의 조선주둔군 사령관. 일제는 이를 ‘조선군’이라 칭했다. 19사단, 20사단 등이 이에 속한다.)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보가 공개되어 있다. 거기에 기록된 당시의 아즈마지대 전투배치사항이다.

“제 19사단장의 보고에 의하면 아즈마지대는 천보산방면의 토벌을 실시하려던 것을 어제 17일 밤에 행동을 개시하여 삼도구로부터 안도로가는 도로일대인 청산리라 부른 곳에 지금 김좌진이 거느린 500~600명 불령선인이 잠복해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계획을 변경하여 지대의 주력으로 이를 토벌하기로 하고 아래와 같이 배치하였다.

1, 국자가, 천보산에 있는 각 대대장들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2개 중대와 1개 기관총 소대를 떼내어 금후의 행동준비를 하게 하였다.

2, 기병연대의 주력은 천보산 방면으로부터 서진하여 오도구를 거쳐 승평령부근에 진격하여 퇴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3, 보병 제 73연대 제 3대대의 주력은 삼도구방면으로부터 그 서남방 약 8리되는 노령을 점령하여 퇴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4, 야마다대좌는 보병 3개중대, 기관총 1개소대, 포병 1개 중대로 18일에 두도구 남쪽 팔가자에서 숙영하고 적정을 정찰하며 점차 전진하면서 20일을 기한으로 토벌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5, 이번 토벌을 위해 무산수비대로부터 일부를 차출하여 석인구를 지나 노령방면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다시 정리하면 ‘야마다토벌대’(山田討伐隊)는 좌·우로 나누어 좌제대는 야마다가 직접 지휘하여 팔가자, 충신장, 송월평을 거쳐 20일 경에 청산리에 도착하였으며, 우제대는 나까무라대대장이 지휘하여 이도구를 거쳐 봉밀구를 우회, 북로군정서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좌우제대가 연결, 포위 섬멸하도록 작전계획이 짜여졌다. 여기에 동원된 병력은 무려 800~1,000 정도로 추산된다.

다시 김훈의 기록이다. “이날 9시경에 과연 적의 완전군장한 1제대가 전열로 우리 매복지 내로 들어오다가 그 척후병이 아군의 진지를 발견하고 그 부하를 향하여 잠복의 신호를 보냈으나 그의 부하는 군기가 제대로 들지 않아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더이다. 아군은 이 기회를 틈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때 적과 아군의 거리는 불과 10보 이내였으므로 적은 적어도 각 병사가 다섯발 이상의 살탄을 맞아 전멸에 이르렀소.(아궁의 진지는 7~80도 내지 100도 이상의 낭떠러지 위였으므로 우리를 올려다 봐야하고 우리는 적을 내려보게 됨)

후방에 계속 전진하던 적의 부대는 지휘의 어수선함이 일어나 형식적으로 아군의 사기를 좌절시키고져 하여 목표방향에 전혀 맞지 않는 사격으로 소총 기관총을 난사 하였으나 일발의 효력도 없었나이다.”

백운평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의 현재 모습.
백운평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의 현재 모습.

이때 야마다토벌대의 전위부대를 지휘하고 들어 온 지휘관은 아스가와(安川) 소좌로써 병력 규모는 증강된 중대급으로 약 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매복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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