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47)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편의대란 민간복장을 하고 거짓정보를 흘리거나 정탐을 하는 일봉의 정보원을 말한다. 김좌진은 편의대까지 운용하는 주도 면밀함을 보였다.

이때 활약한 편의대원중 한 명이 용정 ‘15만원 탈취사건’의 주역이자 ‘철혈광복단원’이었던 ‘전성호’다. 굶주림과 무기도 없는 조선인들 무리가 청산리계곡으로 바로 전에 들어갔다고 했던 것이다. 아스가와는 북로군정서가 진지를 편성하고 작전명령까지 하달하고 있으리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 정도의 전술적 행동을 구사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마적떼 정도이거나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이지 정규군 수준의 체계를 갖추고 있으리라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오전 9시, 적의 전위대가 길을 재촉하며 매복지점으로 모여들고 선두가 직소택 방향으로 경사면에 진입하면서 본진부터 정체현상까지 발생하였다. 김좌진은 그때까지도 사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최초 사격은 선두에서 지휘하던 아스가와가 아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당연히 그 첫발로 말위의 아스가와가 고꾸라졌고 이와 동시에 사방에서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 살육전이었다. 미처 어떻게 해 볼 사이도 없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탄환에 일본군은 순식간에 전멸을 당했다.

이 당시의 전투는 2회에 걸쳐 벌어졌고 3차는 일본군끼리의 오인사격에 의한 전투였다. 먼저 전위대는 완전포위망에 걸려 순식간에 전멸했다. 일본군 본진도 전위가 들어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급하게 도착한 현장에서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적은 보이지 않고 일본군의 시신만 계곡을 매우고 있었다. 매복에 걸렸다고 판단한 순간 본진에도 사정없이 총탄세례가 퍼부어 졌다. 피할 곳도 없었고 피할 수도 없었다. 다만 매복망 밖에서 행군 중이던 일본군만 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제대공격을 감행했다. 직소택 방향으로 기어오르는 일본군의 무모함은 곧 죽음이었다. 그렇게 격전을 치루면서도 일본군은 아군의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운평에는 빈 벌치기 오두막만 남아 있다.
백운평에는 빈 벌치기 오두막만 남아 있다.

그즈음 나까무라가 지휘하는 우제대가 봉밀구를 우회하여 청산리계곡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김좌진은 적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아군을 급하게 철수 시켰다. 이범석에게 전달된 명령서다.

“1. 봉미구에서 돌아 오는 적은 약 1시간 후면 도착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이 있으니 아군은 즉시 이도구 방면으로 철수한다.

2. 제 2제대는 원진지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1제대의 철수가 완료되면 적당한 시기에 철퇴하라.

3. 제 2제대는 오늘 밤 2시 이전에 현진지로부터 160리 떨어진 갑산촌에 도착하라.“

한편 최전방에 있던 김훈은 당시의 김좌진의 계획을 ‘우리의 기묘한 계책과 적의 자충수’라 표현하며 이렇게 기술했다. “그와 동시에 이도구방면으로 우회하던 적의 보병 1개대대가 우리의 왼쪽을 기습하는 걸 탐지한 아군에서는 적으로 하여금 자기들끼리 총질하게 하는 계획을 세워 아군은 전부 부대를 후방으로 몰래 퇴각시켜 우리를 공격하던 적은 과연 아군의 방향을 잃어 버리고 청산리로부터 진입하는 적과 울창한 산림중에 마주치게 되어 양측이 서로 한국군으로 오인하고 돌격을 감행해 다수의 자군 사상자를 냈나이다.(적아의 군복이 상당히 흡사한 고로)”

김좌진은 이미 나까무라대대의 기동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전장도착 시간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 1시간 전 1제대를 철수시키고 2제대는 소단위로 하여 축차적으로 철수시키되, 포위부대가 도착할 무렵 한근원 중대를 마지막으로 은밀히 산악을 통해 철수케 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마천령 마루에서 한근원 중대도 전원 이상 없이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격렬한 총소리를 들은 나까무라대대는 다급하게 청산리 쪽으로 넘어 들어 왔고, 공격을 당하던 야마다본대는 그 병력이 북로군정서로 착각하여 일본군끼리 상호 사격을 하였던 것이다. 직소택 방향에서 날아오는 총탄이었으므로 북로군정서로 착각했고, 나까무라대대는 북로군정서가 포위망을 빠져나간 걸 모르고 전방 직소택 하단부에 있는 부대가 북로군정서로 알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 차렸을 때는 이미 북로군정서는 갑산촌을 향해 1시간 전 전장을 빠져나간 뒤였다.

아이들이 멱을 감던 직소택 일대는 일본군의 시체와 피로 붉게 물들었고, 엄청난 피해에 채 전사자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일본군은 청산리를 되돌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김좌진의 완벽한 승리요 이 승리로 북로군정서 대원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일본군에게는 처음 당하는 치욕의 패전이자 만만하게 보았던 독립군이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고, 백운평 골짝에는 완벽한 승리와 참혹한 패전의 현장만 남았다. 그리고 계곡물의 속도보다 빨리 이 소식은 화룡일대 동포사회에 퍼져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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