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48)

백운평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북로군정서가 갑산촌을 향해 이동하던 그 시각, 야마다대좌는 참혹한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전위대는 물론 후속부대와 우회부대까지 계곡을 가득매운 시신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성도 함께 잃어버린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백운평마을 상대로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한다. 일제는 ‘간도출병사’에 그날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10월 21일 야마다대좌가 인솔한 부대는 이 지방부근에서 무장한 불령선인단과 전투를 하여 약 30명을 사살하였다. 당시 적도는 이 부락민들과 함께 마을 안에다 진지를 수축하고 우리 군에 저항하여 우리 군 수명의 사상자를 냈다. 살해된 조선인은 모두 이번 전투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소각된 가옥에 관해서는 마을 안에서의 전투로 인한 화재와 적도들이 퇴각할 때 삼림에다 놓은 불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다. 아군이 급속하게 돌격하였을 때 패잔병들이 점령하여 저항하던 곳은 이미 소각되고 있었고, 이는 고의적으로 조선인들을 고생시키기 위해 소각하였다는 사실을 똑똑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소위 살아있는 주민들을 태워 죽였다는 참혹한 행위는 우리 제주군인들로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ㄴ는 것이다.”

필자가 백운평에서 가져온 돌맹이. 이 돌은 그날의 비극을 보았을 것이다.
필자가 백운평에서 가져온 돌맹이. 이 돌은 그날의 비극을 보았을 것이다.

일제는 북로군정서군이 백운평을 점령하고 일본군에게 저항하면서 민가를 불태웠고, 그 과정에서 북로군정서군을 사살한 것이지 민간인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말 같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북로군정서는 백운평 동리에서는 전투를 하지도 않았다. 백운평동리 주민에게 죄가 있다면 그들에게 감자와 좁쌀을 내주고 전장을 피해 산속으로 숨었다가 돌아 온 것밖에는 없다. 백운평에서 주민들이 총을 가지고 저항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북로군정서는 전리품도 챙기지 않고 철수했다. 포위부대가 곧 들이 닥치고 본대가 도착해서 협공을 당하기 전에 전원 갑산촌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북로군정서 군이 저항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백운평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총을 구해 총이 있을 수 있으며 잔류병이 마을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함에도 일본군은 스스로 30명을 사살하고 가옥을 불태웠다는 사실을 기술해 놓았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백운평 신선들의 마을처럼 평화롭던 마을을 지옥천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북로군정서 잔류패잔병이라 호도했지만 이는 명백히 주민학살이었고, 직소택에서 바로 철수한 북로군정서가 백운평까지 내려 갈 이유도 여유도 없었거늘 백운평 마을에 불은 왜 질렀겠는가? 분명한 것은 일제가 제 입으로, 제눈으로 백운평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지른 것을 보고 전했다는 것이다.

백운평 마을자리의 부분(남쪽에서 북쪽 방향)
백운평 마을자리의 부분(남쪽에서 북쪽 방향)

백운평 마을은 완전히 절멸되아 버렸다. 그뿐 아니라 청산리계곡의 다른 마을도 연명만 되었을 뿐이지 아수라장으로 변하긴 매 마찬가지였다. 청산리계곡이 붉은 피로 물든 참혹한 만행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1921년 1월 27일자 독립신문에는 간도통신원의 조사자료를 통해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민간인 400여명을 살해하고 120채의 민가, 1개소의 학교를 소각하였다고 발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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