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49)

당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백운평 5·60여 가구 중 단 두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외지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구사일생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연변지역의 조사에 따르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람은 모두 살해하고 가옥은 완전 방화로 마을 자체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두 사람인들 살아도 살았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

더더욱 치를 떨게 하는 일은 1921년 2월 25인자 19사단사령부가 남긴 ‘간도사건에서의 조선인과 중국인의 사상자 조사표’에 의하면 1920년 10월 21일 “변장한 김좌진의 부하 49명을 청산리에서 총살하였다.”고 했다. 북로군정서는 철저한 명령지시에 의거 질서있게 제대별로 갑산촌으로 이동하였다. 심지어 부상병 3명을 담가에 실어 함께 이동하였다. 잔류병이 있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한들 변장한 병력이 49명씩이나 떼로 몰려 있었을 리도 없다. 이는 동포들을 학살한 것이다. 49명을 총살했다고 하나 그 열배가 사망했다는 통계가 엄연하다. 백운평 마을만 하더라도 50가구를 계산해도 가구당 가족 수가 최소 5~6명을 넘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250명에서 300명이 몰살당했다는 이야기다. 엄마젖도 못 땐 어리 피붓이 하며 노동에 허리를 못펴는 백발의 노인, 학교를 마치고 막 집에 들러서는 개구쟁이 어린것들 까지 닥치는 대로 살육의 광기를 부렸다.

싸리촌에서 백운평으로 향하는 길목. 멀리 베개봉이 선명하다.
싸리촌에서 백운평으로 향하는 길목. 멀리 베개봉이 선명하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안나의 일기를 이야기하며 나치의 만행을 규탄한다. 제암리사건과 유관순을 죽인 일제의 강압통치를 빌어 일제의 만행을 기억한다. 중국의 남경대학살을 두고 온갖 위무를 다한다. 그리고 백운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승리의 영광만 기억할 뿐이다. 백운평은 그날이후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을만 사라진 게 아니라 사람들도 사라져버렸다. 일제는 군인이 아니다. 진정한 군인은 대의와 명분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것이 군인의 자세다. 일제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돌연변이의 광란동물이다.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일본인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반성이나 그들의 만행에 사죄하는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 종족을 어이해야 백운평의 원한이 풀릴 것인가.

직소택에서 백운평으로 걸어 내려오면서 차마 떨어지지 않았던 발걸음은 비단 그날의 백운평 동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날도 모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철없는 연애인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 료칸에서 일본 요리를 먹으며 세상에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환상적인 맛이라느니 일본상인들의 친절이 어떻고 운운하며 떠들고 있기에 채널을 돌려버린 그 참담함이 자꾸 생각이 나서였다. 그렇게 애써가며 일본을 선전해 줄 건 또 뭔가 싶기도 하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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