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0)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이날을 위해 왕청에서 모질다 할 만큼 강훈련을 시켰다. 그 역량이 여실히 드러났다. 명령체계는 톱니바퀴처럼 완벽했고 명령수행 능력은 그 어떤 군대보다 탁월했다. 김좌진은 부하를 믿었고 부하들은 김좌진의 명령수행이 곧 승리를 보증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범석의 우둥불에 나와있는 쌍방의 피해는 일본군이 2,200여명 사망, 아군 전사자는 20명이며 중상자가 3명이며 20여명이 행동이 가능한 경상자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여러 연구서나 일본군의 당시 제대편성으로 보면 야마다 본대나 나까무라 우회부대를 포함하여 900명 남짓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전멸당한 제대를 증강된 중대규모로 약 200명 정도다. 두 번째 부대 규모를 400명, 우회부대가 약 400명 정도였는데 이를 모두 더하면 일본군 300명 정도가 사망한 것이 타당하다고 봐야한다. 채 헤아릴 수 없는 병력이 몰려들었고 그 좁은 계곡에 5~600명이 아우성치며 죽어 가는 걸 봤을 때 일본군의 시신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연히 지대장(증강된 연대규모)이 지휘하는 부대였고 두 개의 제대가 한꺼번에 맞붙었으니 전장에서 직접 체감한 이범석이 봤을 때는 과장했다기 보다 충분히 그렇게 추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가야할 다음 집결지인 갑산촌은 멀었다. 실재 직소택에서 갑산촌까지는 직선거리로 20km 즉, 50리 남짓 떨어져 있다. 그런데 김훈이나 이범석이 기록한 김좌진의 명령서나 모두 ‘160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160리라면 60km가 넘게 떨어져 있어야 된다. 현재의 국군 보병이 산악으로 행군할 때 기준이 되는 평균속도를 시속 4km 정도를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15시간 이상 걸릴 수 있는 거리다. 물론, 산술적으로는 맞다. 백운평 전투는 2시간 정도의 단시간에 끝났다. 9시에 쯤에 공격을 시작하여 11시경에 1제대가 철수하고 30분~1시간 뒤에 모든 부대가 철수한 것을 감안하면 새벽 2시까지 강행군을 했다고 가정하면 거의 160km를 걸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정찰과 휴식시간, 그리고 부상자와 함께 이동해야 되는 여건을 감안하면 아마 이동이 수월한 도로로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도처에 이동 혹은 전개 중이었으므로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해서 마천령(摩天岺)을 넘어 봉밀하(蜂蜜河)를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갑산촌 판공실.
갑산촌 판공실.

능선과 고지를 밟는 산악행군을 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돌아 갈 수밖에 없었고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갑산촌에 이르는 지형 역시 도상뿐 아니라 첨병 역할을 담당하는 제대에 그 지역출신의 대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적의 시선을 피해 이동이 가능했다. 도상에 나와 있는 촌락과 도로에 의존하여 기동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에 맞추어 길잡이로 중국인이나 친일 조선인을 앞세운 일본군과는 예초 주도면밀함에서 한 수 앞이었다.

그러나 이동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추위와 굶주림과의 싸움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김훈은 백운평전투 직전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아군은 싸리밭촌에서 한때의 식량을 준비하여 청산리산림 속으로 20리를 몰래 행군하여 산림중에 하룻밤을 노숙하고 다음날(즉 20일)에 이르러서는 휴대하였던 식량이 다 하였으므로 그 날은 굶게 되었소. 적은 벌써 싸리밭촌에 도착하였습니다. 아군에서는 그날 밤에 군사 50명으로 하여금 싸리밭촌으로부터 1리반 쯤 떨어진 임연소촌락에 파견하여 양식을 운반하여다가 각 부대에 분배하니 병사마다 감자 세알에다 좁쌀 한 사발씩이었는데 이것을 한꺼번에 먹지말고 아껴먹으라고 하였으나 여러끼를 굶은 때문에 한꺼번에 다 먹고 말았소.” 백운평전투의 용전은 그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싸웠던 눈물겨운 투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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