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1)

김좌진인들 8척 장신의 서른둘의 왕성한 혈기에 춥고 배고프지 않았을까? 연성대장 이범석도 마찬가지였다.

“추위와 주림과 피곤이 온 몸을 휘감았다. 한나절의 격투를 치루고도 우리는 한방울의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산바란이 길을 막는 비탈길을 더듬어 자산춘(甲山村, 갑산촌의 중국음)으로 향했다. … 만주의 깊은 가을바람은 예리한 칼로 오려 내듯이 홑 옷으로 가린 우리 살을 에었다. 밀림 속에는 길이 없다. 그저 우리가 밟고 가는 곳이 길이다. 쓰러진 수목과 허물어진 바위의 돌가루가 도처에 쌓여있고 산비탈은 갈수록 험해질 뿐이었다. 밀림을 지날 때면 우거진 나뭇가지가 길을 가로막아 도끼로 이를 찍어야만 길을 열 수가 있었다. 우리들의 전신은 쉴새없는 산과 밀림과의 싸움이었고 한없는 굶주림, 추위, 피곤과의 싸움이었다.”

북로군정서 대원들이 와록구에서 동계피복을 장만했다고는 하나 동절기에 대비하여 군장 속에 넣어 둔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 그들은 홑 군복만 입고 있었다. 그리고 부상자는 나뭇가지를 잘라 만든 임시 ‘담가’(擔架, 들것)를 어깨에 메고 부상당한 동료들과 함께 이동했다. 그리고 봉밀하를 건너고 다시 산 능선을 타며 삼림을 뚫고 나아갔으리라. 그렇게 14시간여에 걸친 행군 끝에 밤 2시 40분 전원이 갑산촌에 도착하였다.

선발대를 인솔하여 갑산촌에 먼저 도착해 있던 김좌진은 목이 메었다. 이범석은 김좌진이 30분 동안이나 자신을 껴안고 감격해 했다고 회상했다. “김장군은 눈시울에 어른거리는 빛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김좌진은 후위 철수명령을 내리고도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혹, 철수로가 막혀 전멸하지는 않았을까? 나까무라부대와 마주쳤다면 철수가 힘들었고 설사 개별철수를 한다 해도 이 험준한 산곡을 헤집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온갖 상념이 뇌리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대는 아주 조직적으로 축차철수를 완료하고 부상자들까지 거두어 갑산촌에 도착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식을 만난 기쁨 쯤 되지 않았을까? 감격적이라는 말 외에 설명하기 쉽지 않다.

한편, 먼저 도착했던 김좌진은 갑산촌 동포들에게 대원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부탁했다. 갑산촌은 함경도 갑산(甲山)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갑산은 개마고원 동쪽에 자리하여 백두산을 머리에 이고 사는 지역이다. 농토를 찾아 흘러 들어왔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넓게 펼쳐진 평야는 없었다. 이곳도 농토가 부족한 골짝 경사면에 마을이 있다. 해서 논이 없는 곳이다. 처녀가 쌀 한 됫박을 못 먹고 시집가기는 고향 갑산이나 매 일반이었다. 그래도 억척스레 경사지를 개척하여 감자를 심고 기장을 키웠다. 궁벽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열심히 살아 온 세월 덕에 쌀밥은 아니어도 자식들 배는 굶기지 않았다. 겨울이면 사냥이 주업이었고 봄철부터 아낙들은 산채거두길 쉬지 않았다. 다행히 기장을 수확한 뒤라 600명 가까운 장정들의 배를 채울 만한 기장밥이 지어졌다.

구,신 장녕촌. 갑산촌에 포함돼 있는 마을이다.
구,신 장녕촌. 갑산촌에 포함돼 있는 마을이다.

지금도 갑산촌은 큰 학교까지 가진 동리다. 남쪽이 상대적으로 높고 북쪽이 낮은 계곡을 따라 ‘신·구 장녕촌’(長寧村)과 ‘영산촌’(靈山村), ‘갑산촌’(甲山村)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연결이 되어 행정명으로 ‘갑산촌’이라고 한다. 일부 지도에는 영산촌으로 표기되어 있고, 10여 년 전쯤의 기록을 봐도 ‘갑산촌은 현재 영산촌이다’라는 표현이 대종을 이룬다. 그러나 영산촌은 갑산촌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부락은 1930년대에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부락으로 당시나 지금이나 갑산촌과는 무관하다.

봉밀구 골짝을 타고 내려오다 보면 새로 생긴 도로와 만나는 삼각지점에 비스듬히 골짝을 메우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 보이는데 바로 갑산촌이다. 지금도 농토가 그리 넓지는 않다. 그곳에 100년 전인들 주민이 얼마나 살았을까 만은 기록에만 의하면 근동에서는 당시에도 제일 큰 마을이었다. 하지만 600명의 장정들을 먹일라치면 마을의 찰기장이 얼마나 줄었을까 싶다. 그래도 동포들은 흔쾌히 맞아 주었고, 기꺼이 내 주었으며 한술 더 떠서 마을의 집집마다 고방에 불을 집히고 대원들을 쉬게 했다. “하루 종일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리다 갑자기 방안의 온기를 접하고, 또 거기에서 뜨끈뜨끈한 차조밥을 마구 삼키고 나니 대부분의 동지들은 땅바닥이나 온돌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지고 말았다.” 이범석의 말이다. 꿀처럼 달콤한 휴식이었다.

그러나 휴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적의 동향이 첩보로 들어왔다. 그나마 병사들은 한 시간 남짓이나 쉴 수 있었지만 김좌진과 참모들은 쉴 여유가 없었다. 이웃마을에서 돌아 온 주민이 천수평에 일본군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김좌진은 바로 정찰병을 보냈다. 첩보는 정확했다. 적 기병이 천수동에서 숙영하고 있는 것을 방문까지 열어 보고 확인한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어랑촌에 보병 2개 대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가 어랑촌에서 숙영하고 있다는 정보까지 획득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막 단잠에 빠진 대원들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청산리대첩의 두 번째 승전 ‘천수평(泉水坪)전투’의 막이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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