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2)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천수평 마을은 현재 없다. 갑산촌에서는 봉밀하를 따라 도로로 이동하다가 ‘계남’(鷄南)에서 좌측으로 또 하나의 물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이 물길의 이름이 지금도 ‘천수동구’(泉水洞沟)다. 중국인들은 ‘양수천자’(凉水泉子)라 불렀다. 거기에서 어랑촌까지는 8km가 채 안 된다. 갑산촌에서 급하게 일어난 북로군정서 대원들은 계남 방향으로 가지 않고 바로 산을 넘었다. 고갯길 두 개만 넘으면 된다. 천수평에는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조선인 10세대, 중국인 1세대가 살았다고 하였으나 이범석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 천수평골 안에 3개 동포부락이 있었고 모두 동포마을이었다. 특히 중간마을에서 일본군이 숙영을 했는데 그곳에는 물레방아가 있고 술도가까지 있었다. 물레방아는 물길이 좋기도 해야 하지만 평지인 천수평일대를 감안하면 근동의 촌락이 두루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지 않았나 싶다.

필자가 답사한 현장의 모습도 평탄한 평지가 넓었고 봉밀하의 개울도 농사를 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계곡까지 찾아들던 우리 동포들의 생활력을 감안하면 10가구밖에 없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120명이 열 가구 밖에 되지 않는 곳에 분산해서 잔다고 가정을 해도 1가구당 10명 이상씩 잤다는 말인데 이는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다. 물론 함경도식 양통집의 구조를 감안하면 고방과 정주방에 채워서 잔다면 못잘 것도 없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록을 보면 모든 전투에서 전사는 1~2명이고 북로군정서군은 도망을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패전을 감추기 위한 허위보고다. 일제의 기록 중 아군에 대한 첩보나 정보는 명확한데 반해 일본군의 피해나 전장상황은 신빙성이 없다. 이를 참고하거나 인용을 할 때도 전술적 식견 없이는 상황파악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일본군의 기록보다 이범석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아무튼 김좌진의 입장에서는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천수평은 어랑촌의 배후가 되기 된다. 북로군정서가 어랑촌으로 이동할 때 이들이 아군의 이동을 알아차리고 협공내지는 최소한 본대에 연락할 빌미를 주기 때문에도 이들을 먼저 제거해야 됐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 일어나기 전 야음에 전투를 종료하고 차후 본 작전인 어랑촌전투에 대비하기 위해서 대원들을 전선에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수평 입구. 현재 천수평은 임장으로 변해있다.
천수평 입구. 현재 천수평은 임장으로 변해있다.

천수평에 숙영중인 병력은 시마다(島田)가 지휘하는 제 27연대 기병중대로 기동순찰이 주 임무였다. 이들에 의존하여 일본군은 정보를 얻고 기동의 안전을 확보하고 있었다. 기병중대는 북로군정서가 천수동 인근, 이를테면 갑산촌이나 이도구 일대까지 그렇게 빨리 이동해 왔으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술도가의 울타리 토성 안에 말을 메어둔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김좌진은 신속하게 병력을 배치했다. 김훈 중대는 북쪽 산을 타고 나가 신속하게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민화 중대는 남쪽고지를 점령케 했다. 그리고 이범석으로 하여금 2개 중대를 이끌고 정면 기습공격을 하도록 하였다. 10월 말의 북만주 새벽은 마치 눈이 온 듯 서리로 하얗게 변한다. 새벽 5시. 뿌옇게 동이 트고 있었다. 정면 공격을 위해서는 봉밀하의 냇물을 타고 가야 했다. 이도구를 향해 흐르는 냇물은 폭이 5m로 양편언덕은 매우 가팔랐으며 높이는 다섯 자 가량이 된다. 막 일본군이 숨어있는 마을에 도착하자 보초를 서던 순찰병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그 순간 공격개시 신호가 올랐다. “아직 미명에 우리 여행단 80명이 포위하고 장차 습격하려 할 제에 우리의 후방부대에서 수차례에 걸쳐 총성이 울리자 적은 놀라서 도보로 혹은 말을 타고 도망하는 것을 아군 400명이 일시에 사격하여 탈주한 4명의 기병 외에 전부 멸하였나이다. 적은 감자굴 안에 숨어들어가 생명을 애걸하는 것을 폭탄을 터트려 분쇄하였나이다. 이제 아군은 전장 정리에 들어가 전리품을 수거 하였나이다.” 김훈의 회상이다.

기습을 받은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북로군정서군 뿐만 아니라 어떤 독립군도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정보가 없었기에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대가 선봉에 서고 마을 후사면 고지에는 1제대가 집중사격 준비를 한 상태에서 남쪽으로 달아나면 이민화 중대에게, 북쪽으로 달아나면 김훈중대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마을 안에서 도망한 기병들은 김훈의 말대로 400여 총구 앞에 속수무책 죽어나갔다. 아군은 전사 2명에 부상 17명, 적은 시마다 중대장을 비롯하여 중대원 중 도망에 성공한 4명 외에는 전멸이었다. 적이 숨었다는 감자굴은 고구마 저장고였다. 4명이 숨어 들어 투항을 종용하자 응전을 하는 바람에 수류탄으로 제압을 했다. 이때 단 한발의 수류탄으로 적을 제압한 대원은 왕년에 야구 명투수로 이름을 날린 김홍렬(金弘烈)이었다.

전리품은 말과 4·4식 기병총, 군도, 망원경, 전화기 및 의약품 등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동계외투도 챙겼다. 망원경은 시마다가 지녔던 것으로 김좌진은 여행단장인 이범석이 사용하도록 했다. 그 외에 일본군의 전투식량인 건빵을 챙겨 급한 대로 이동 간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마다가 전령을 통해 사단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를 획득했다. 보고서에는 19사단 주력이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으며, 시마다 중대 규모는 인마가 120기로 편성되어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천수평 마을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천수평 마을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천수평 전투는 기습전의 완벽한 전형을 보여주는 작전이었다. 이틀 동안 잠조차 자지 못한 대원들이었지만 단숨에 6km의 산등성을 넘어 신속하게 전개를 완료했으며 제대 간 철저한 협조로 적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위망까지 구축한 작전이었다. 사격에 있어서도 돌격부대가 마을 안에 있을 때는 외곽지역으로 도망하는 일본군들에게만 사격을 집중했으며 돌격부대는 적의 전열을 흩어 놓는 역할과 토성 안의 군마를 없애는데 주력했다. 말이 없는 기병부대원들은 도보로 도망치기 급급했고 도보로 도망치는 일본군은 그대로 아군의 집중사격에 죽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대장 시마다도 부하가 건내 준 말을 타고 도망하다 집중사격을 받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성한 보고서 마지막 문구는 ‘인원보고: 인마(人馬) 120기 이상 없음’이었다.

천수평에서 전리품을 수습하자 10월 22일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계속>

저작권자 © 팩트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