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3)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천수평에서의 승전 후에도 김좌진은 부하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어랑촌 일대에 집결된 일본군이야 말로 북로군정서를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본진이었다. 우선 이들을 궤멸시켜야 했다. 백두산일대에서 주둔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그랬고 차후를 기약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진검승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부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택한 마을이 갑산촌이었고, 천수평은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시 병력을 다음 전장으로 이동시켰다. 여행단은 874고지 3부 능선 정면에, 그리고 1개 중대는 천수평 동남쪽 계남촌 지역의 544고지에 매복시키고 나머지 병력은 여행단 좌측을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차후 1중대가 임무를 완료하고 난후에는 여행단의 우측을 보강하도록 하였다.

천수평에서 도망친 4명의 일본군 기병대는 어랑촌 본대에 즉시 보고했다. 아군은 더더욱 지체할 틈이 없었다. 설사 도망간 4명의 보고가 아니더라도 이도구 골짝의 새벽을 뒤흔든 총성을 일본군도 들었을 것이다. 북로군정서가 급하게 전리품을 챙기고 이동을 시작할 무렵 적은 천수평일대를 향해 포병공격을 개시했다. 김훈은 여기에서 아군 1명이 전사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고 했다. 김좌진은 적의 포병공격이 아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수평 서편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1제대 병력이 계남 방향으로 이동을 할 무렵 적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군이 어랑촌 서남단 고지를 먼저 점령하기 위해서는 급속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랑촌 서남단 압계골(鴨鷄沟)이 874고지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먼저 점령하는 쪽이 이미 절반의 승리를 보장 받는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범석은 당시의 긴박함을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조우전(조우전)의 승리는 적에 앞서서 중간 지구의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는데 있다는 것은 전술상의 철칙이라 할 수 있다. 경각을 다투어 마로꼬우 고지를 점령해야 된다. (중략) 우선 위랑춘 고지를 향해 사관생도들은 거의 구보로 전진했다. 그 때 벌써 적은 중포사격을 개시했다.”

아군이 이동을 완료하여 진지를 선점할 때까지 더 가까운 거리에 있던 일본군이 왜 먼저 874고지를 선점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일본군의 전투상보에 그 이유를 밝힐리 만무하다. 다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천수평 전투이후 아군이 아직 이동준비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란 판단으로 천수평일대에 대한 포사격만으로 일차 저지하려고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전투부대가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부대이동준비를 채 마치지 못한 것 또한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그만큼 북로군정서의 천수평 기습과 이동이 신속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왕청 십리평에서의 체계적이고 혹독했던 훈련은 실전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의 체력은 물론, 정신전력, 명령체계, 군기 등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최강의 전투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북로군정서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동간 적들의 중포소리를 들으며 곧 있을 전투에서는 그 포탄이 아군의 머리 위로 떨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랑천 서남단 고지를 점령했을 때도 적들의 중포소리는 은은하게 들려왔다. 김좌진도 알았다. 적들이 중포공격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중포소리에 동요의 빛을 보이는 부하들을 안정시키는 것도 그의 몫이다. 참모 한 사람이 김좌진에게 중포소리 아니냐며 물었다. “저 소리는 중포 소리가 아니야. 천수평에서 동포들이 물레방아를 돌리는구만.”이라고 들어라는 듯 참모들에게 큰 소리로 지청구를 주었다. 참모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눈을 껌벅거렸다. 김좌진의 속내를 알아차린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천수평에서 물레방아를 돌리기 시작했다고 하자 이내 안정을 찾았다. 이범석의 회고다. 사실 이때까지 북로군정서 병사들은 일본군의 중포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다. 지금까지의 매복, 기습전에서 적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장비는 박격포 정도의 소형 포였다. 그리고 중저음의 포 소리는 고향동네 물레방아소리와 흡사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랑촌은 1910년 경술국치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의 주민 10여 호가 처음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이다. 어랑면은 경성의 남쪽에 있어 명천군과 인접한 곳이며 물길이 좋고 호수도 크다. 청산리골, 이두구, 천수평골 등 이 어구의 동리들은 거의가 자신들이 살던 옛 지명을 그대로 가져다가 동네 이름으로 삼았다. 그러다보니 그 곳이 고향같기도 했고 새로 태어난 후손들은 굳이 고향을 외우지 않아도 조상의 뼈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았다. 그 덕분에 법이 없는 세상처럼 혼돈스러운 시대와 땅에서 살면서도 단합이 되었고 질서가 잡혔다. 북만주 동포들의 삶의 기저에는 그런 일체감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지금의 어랑촌도 경성군의 어랑면처럼 동서로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봉밀하를 따라 남서에서 동북 방향으로 이어진 영산, 갑산, 계남, 어랑, 와룡 등의 마을들 중에 유독 길게 이어진 마을이 있는데 그 중간에 있는 마을이 어랑촌이다. 당시 마을을 연지 10여년 남짓이었지만 제법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나눌 땅도 있었다. 마을의 뒷산은 그리 높지 않아 언덕배기까지 집이 들어서도 될 만했고, 마을 앞을 흐르는 봉밀하는 가뭄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좋을 곳이었다.

당시 북로군정서가 점령했던 어랑촌 고지는 어랑촌 마을 뒷산이 아니다. 어랑촌은 일본군 아즈마지대 본대가 주둔하던 장소이며 김좌진은 일제의 기록대로 그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던 서쪽 길목인 874고지를 점령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어랑촌 전투 역시 전투지역의 대표적 촌락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어랑촌 마을에서 일어 난 전투는 아니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김춘선의 경우 ‘어랑촌 전투지점인 874고지는 천리봉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천리봉 남쪽이면 어랑촌 마을 서쪽 3~4km 정도 떨어 진 곳이다. 또, 연변 박물관의 김철수는 ‘874고지는 압계골 막측으로 보인다.’고 그의 ‘연변 항일 사적지 연구’에서 답사결과를 기록해 놓았다. 그러면서 현재의 지도상에 나와 있는 887고지가 그 현장이며 그 부근 847고지도 있다고 한다.

필자도 김철수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887고지의 남쪽과 골짜기 맞은편의 여러 봉우리들 중에 천리봉을 제외하고는 870m를 넘는 고지가 없으며 887고지의 북쪽으로는 대부분이 900m이상의 고지들이다. 그리고 천수동에서 그 뒷산을 타고 어랑촌 방면으로 이동을 해 와도 골짜기도 없을뿐더러 전투를 치룰 만한 장소도 마땅찮다.

어랑촌 전투 현장. 위 능서이 주 전투현장이다.
어랑촌 전투 현장. 위 능서이 주 전투현장이다.

반면 887고지는 압계골 골짜기에서 고지로 올라 뻗은 골짜기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또한 부근에서 제일 높은 골짜기인지라 적을 제압하는데도 유리한 지형이다. 그리고 어랑촌 방면에서 천리봉을 거쳐 887고지로 접근하려고 해도 깊은 골짜기를 건너야하기 때문에 적의 대부대가 기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우회작전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김좌진은 어랑촌의 야마다지대가 북로군정서의 소멸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반드시 일전을 치루어야 되고 지근거리에 잇는 관계로 더 이상 피전을 강구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이 부대는 연대장 ‘가노우’(加納)대좌가 직접 지휘하는 기병연대를 주축으로 보병, 포병이 통합 편성된 여단규모 전투단으로 병력 규모는 5,000명이 넘는 대부대였다. 그래서 오히려 청산리에서 쫒는 적의 한 팔을 절단 내고, 천수평에서 찾아다니는 적의 눈을 없앤 다음 유리한 고지에서 승리의 여세를 몰아 결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 계획은 최소한 갑산촌에서나 청산리로 이동할 때 수립되었다고 봐야 한다. 적의 전체 규모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본대의 주둔지가 어랑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이를 추정할 수 있는 증거로 일본군이 말한 874고지에 신속하게 병력을 배치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우연히 발견할 수 없는 지형이고 우연히 발견했다고 해도 600여명의 병력을 대상으로 일시에 진지편성까지 마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적의 의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면 방어진지는 함부로 편성할 수 없는 것이 진지전의 기본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을 김좌진은 이미 알고 있었고 작전계획까지 수립해 놓았던 것이다. 다만 고지에서 공격해 오는 적을 맞는 것은 방어전의 형태이지만 지역을 보존하기 위해 하는 전투가 아니기 때문에 ‘유인전’(誘引戰)이라 함이 오히려 적합하다고 하겠다.

김좌진의 의중은 적확했다. 전후를 따질 겨를이 없는 일본군은 이틀 동안의 참패를 만회하는 동시에 무기와 병력의 숫적 우세를 바탕으로 북로군정서를 충분히 궤멸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적들도 874고지일대만 장악하면 북로군정서의 이동로를 차단하고 포위섬멸이 가능하다는 판단아래 874고지를 점령하고자 병력을 움직였다. 사실 전투단장 가노우가 북로군정서의 실체를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김좌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의 일부분을 궤멸시킨 후 아군의 정체를 드러내며 마침내 진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상방 중 한쪽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건곤일척의 격전이 어랑촌 삼거리를 내려다보는 874고지 산록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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