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4)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에 기록된 어랑촌 전투다. 길지만 모두 인용한다.

“동 9경부터 피아가 공히 고지를 점거하고 전투를 개시할 새 우리 제1중대가 어랑촌 고지 남측 기슭에 선등(先登)하야 산복(山復, 산능선)으로부터 복상(伏上, 포복으로 접근)하는 적을 급사(急射)하매 적은 혹은 중탄(中彈, 총알에 명중)하여 죽으며 혹은 괴주(궤주의 오기, 潰走)하여 퇴하였나이다.

우리의 여행단과 기타의 부대는 천수동 서북쪽고지에서 그 우측으로 협박(狹迫)하려는 적의 기병을 난사하야 진행을 제재(制裁, 저지)하고.

어랑촌 산림 후방으로부터 적의 보병 100여명이 등산하려고 밀집하는 것을 우리 군이 화력을 맹렬히 주(注)하매 적은 미처 착수치 못하고 어랑촌으로 퇴입(退入)하였나이다. 그 퇴하던 적의 1소대가 화선을 탈하야 삼림을 차지하고 상오로부터 해질 때까지 교전 하였는데 이 전(戰)에서 우군 3인이 부상하였나이다.

전기(前記)의 전(戰)에서 적은 우리의 4배의 병력으로 각 병종의 성능을 극도로 발휘하여 재삼의 돌격을 행하였으나 마침내 지지치(지키지) 못하고 퇴각을 단행하였으니 이는 그 연고는 다른데 있지 않고 전혀 우리 군이 제선의 기(制先의 機, 선제공격의 기회)를 득함이었나이다.

우리 군은 양호한 진지를 차지하고 겸하야 세 시간 남짓의 노력한 전투준비로서 만일의 웃산(더 높은 고지)이 없이 선제의 리(利)를 취하였음으로는 (적은)우리의 정면을 견제하며 기병으로는 우리의 측면과 뒤를 협박하고 포병으로는 초월사격을 시도하여 백방으로 승리를 도모하였으나 마침내 아무 효과가 없었나이다.”

먼저 김훈이 말한 어랑촌 서남단 고지는 임정의 ‘군무부 보고’에도 나오는 ‘어랑촌 전방 3리’되는 고지를 말하는데 이 고지는 지금의 계남촌 동북쪽 천수골 어귀에 자리한 554고지로 판단된다. 이 곳은 어랑촌에서 서남쪽으로 약 2km 정도가 되는 거리에 있는 바, 고지의 북쪽과 서쪽은 정상으로부터 내려 오는 급경사 지역이어서 천수동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적을 제압하는데는 더 없이 좋은 지형이다. 이범석이 밝혔듯 천수동을 습격한 주력은 여행대였고 이 여행대는 전투 종료 후 천수동 뒷산을 타고 874고지 부근으로 이동하고, 제1중대는 빠져나가는 적을 잡는 한편 어랑촌으로부터 이동해 오는 적의 지원군을 저지·격멸하는 임무를 띠고 554고지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천수동에서 기습을 받고 몰살당했다는 급보를 접한 일본군은 급하게 천수동으로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554고지에 매복한 북로군정서에 막혀 또다시 참패를 당하며 퇴각했던 것이다. 이 매복전이 어랑촌전투의 시작이다.

874고지 남측 자락인 554고지 일대.
874고지 남측 자락인 554고지 일대.

이때 비로소 일본군은 북로군정서군이 874고지까지 선점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더 이상 천수동에 북로군정서가 없다는 것을 알고 874고지 일대에 때한 집중 공격을 개시한다. 이 때 554고지에 매복 중이던 제1중대 병력들도 퇴각하여 874고지를 선점해 있던 여행대와 합류하여 이후의 전투를 치른다.

여행단이 천수동습격 후 신속하게 874고지로 전개하지 못했다면 일본군이 874고지를 선점하여 554고지에 있던 아군의 안전도 기약하지 못했다. 그때 여행단 방향으로 공격한 부대는 가노우 기병연대 본대였다. 이 부대는 여행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김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군이 난사했을 정도이니 치열한 사격전이 전개 되었던 것이다. 사격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화망구성이 얼마나 잘되어 있고 기관총과 각 부대 간 사격협조가 원활하게 이루어 지느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각 개인이 움직여야 하므로 협조된 사격이 쉽지 않다. 그러나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적을 바라보고 쏘기 때문에 협조여하에 따라 성패가 갈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부대 간 협조와 각개병사의 사격능력이 중요하다. 이 협조와 병사의 능력은 바로 훈련의 양과 질이 결정한다. 북로군정서의 능력은 당대 최강의 부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군의 사격능력 앞에 일본군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고 계속 돌격형 공세를 이어갔다.

한편, 554고지 방향으로 이동하던 부대가 매복에 걸려 참담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자 김좌진은 즉시 1중대 병력을 874고지 사면으로 이동시켜 방어력을 보강했다. 그러자 더욱 촘촘한 화망이 구성되었고 북로군정서의 전력은 당연히 더 튼튼해 졌다.

그러나 적들의 반격은 만만찮았다. 당대 최신의 무기와 황군이라는 자긍심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도 집요했다. 874고지를 포위하기 위해 좌우 양면으로 우회 공격을 감행했고, 정면으로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삼면 동시 공격을 퍼부었다. 어느 한 쪽 면이라도 돌파가 되면 이는 곧 북로군정서의 궤멸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혹 북로군정서가 그동안 보여 왔던 기동력을 살려 후방으로 철수하거나 후퇴하는 상황을 감안하여 중포로 무장한 포병대가 초월사격까지 쉴 새 없이 퍼부었다.

함에도 불구하고 북로군정서는 기민한 기동력을 후퇴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고 진지변환에 활용하며 적이 어디로 오든 빈틈없이 격멸시켜나갔다. 최초 3부 능선에서 5부 능선으로, 주 고지를 중심으로 3개의 고지에서 전개된 방어진지를 2개의 고지로 축소하여 신속한 진지 변환을 하는 등 적이 몇 십 미터를 전진해도 다시 전열을 정비해 공격을 시작해야 되는 지경으로 일본군의 진을 뺐다. 정비를 위해서는 어랑촌 일대로 다시 후퇴와 집결을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군이 일제 공격을 시도한 것도 세 차례나 된다. 그리고 공격방향은 바꾸어 돌격하기도 했다. 이럴 땐 진지를 변환해가며 기동방어로 맞섰다. 한참을 우회한듯해도 북로군정서가 정면에서 집중사격을 가해왔고 3면 동시 공격을 해도 한군데도 무너지는 곳이 없었다. 사상자만 늘어 날뿐 이를 악물고 지키는 데는 기가 질릴 노릇이었다. 더욱이 일본군도 무한정의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랑촌에 주둔한 가노우의 전투단만 하더라도 여단급 규모인데 다른 곳에서 병력을 돌려 당장 지원이나 증원해 줄 형편도 못 되었을 뿐더러 가노우의 입장에서는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볼 문제는 왜 일본군은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계속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일본군의 특징 중 하나가 공격을 할 때는 항상 돌격형 공격을 선호한다. 이는 황군의 정신력으로 죽음을 불사한다는 얼핏, 군인다워 보이지만 무모함이라는 사실을 호도한 것과 다름 아니다. 나의 부하를 살리고 적을 무찌를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그래서 손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전쟁에 있어서 지고지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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