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5)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

실재 일본군은 러일 전쟁 시에도 여순의 백옥산 하나를 점령하기 위하여 6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마치 6·25 당시 중공군이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도스께끼’(돌격,突擊)만을 종용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전쟁에서는 이겼다. 그 육상전의 지휘관이었던 ‘노기 마레스께’는 군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피아 구분 없는 잔인한 살육이 전쟁의 본질로 생각하는 비인간적 민족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런 것들이 일본군의 인명경시와 돌격신화에 매몰된 전쟁사상을 낳았던 것이다. 이런 양상은 태평양전쟁까지 그대로 적용되었다. 총을 든 상대 앞으로 장검을 빼들고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달려드는 모습이 참 군인이라 여겼다. 그런 것을 소위 ‘사무라이 정신’운운하며 권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랑촌 전투는 874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다. 상방의 전투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치룬 전투였다. 일본군은 이를 간과했고 김좌진은 이 전투의 성격을 이해했다. 차후 백두산밀영으로 들어가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든 북로군정서를 소멸하겠다고 투입된 부대를 궤멸시킴으로 북로군정서의 차후 이동에 최대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함이 전투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물론, ‘원수들을 물리친다’는 민족적 투쟁의 본질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결국 조국광복전쟁이라는 전략적 측면의 큰 그림이었고, 당면과제는 현제의 상황을 타파하고 후일을 기약할 수 있는 역량 즉, 아군의 전투력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어랑촌에서는 훗날 동북항일연군도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바 있다.
어랑촌에서는 훗날 동북항일연군도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바 있다.

김좌진은 이 전투에서 승리 한다면 엄청난 병력 손실로 당분간 가노우 부대는 물론 아즈마 지대까지 정상적인 전투력 발휘가 불가능하리라 판단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일본군은 야간전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도 김좌진은 간파했다. 어차피 이 전투는 일몰까지만 버티면 되는 전투였다. 청산리대첩에서 치르진 전투는 모두 주간 전투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미숙한 지형에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경우 더욱 더 피해가 클 것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또 여기에 투입된 일본군은 솔직히 그만한 전투력을 가지지 못했다. 더욱이 여단급 규모의 전투단급 부대가 수행하는 소규모 전투이므로 주야 연속작전은 병력의 규모 면에서도 불가했다. 어랑촌 전투에서만 보더라도 일본군이 체계적으로 예비대를 운용했다거나 한 흔적은 없어 보인다. 그냥 막무가내로 토끼몰이 하듯 섬멸전으로 일관했다. 다시 말해 정규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오히려 섬멸 당하고 마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사실 나남(청진시)에 주둔했던 일본군 19사단 병력은 두만강지역의 국경수비가 주 임무였고, 한 번도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경험이 없는 병사들이었다. ‘황군’이라는 겉모습으로만 포장되었을 뿐, 억압과 약탈에는 능했지만 북로군정서 같은 정예부대와 정규전형태로 맞붙은 적이 없었다. 그나마 러시아에 파견된 ‘포조군’(浦潮軍)사단들이야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있던 시베리아에서 전장 경험이라도 있었지만 나남 주둔군은 힘없고 굶주린 한반도 민중을 억압하는 만행, 특히 3·1운동을 제압하는 따위의 민정부분 외에는 해 본 것이 없는 병력이었다. 오로지 지휘관의 명령에 또다시 산을 오르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또다시 전열을 챙겨 올랐지만 눈덩이처럼 피해만 커져 갈 뿐 이었다. 지휘관에게 올바른 건의를 할 수 있는 시스템도 없었다. 오로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일본군의 최고선이었다. 판도의 변화가 없이 점점 해가 874고지로 넘어 갔다. 북만주골짝의 늦가을에는 밤도 일찍 닥친다.

보름을 몇일 남겨둔 하늘엔 실한 달이 떠올랐다. 찬바람과 어울리지 않는 달빛이었지만 길눈 밝은 북로군정서의 입장에서는 철수로 찾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본군을 아직도 공격 중이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이미 꺾여있었고 관성적인 형태의 공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김훈과 한근원에게 각각 1개 중대씩을 지휘하여 후위대 임무를 맡기고 본대는 장인강 상류쪽 노두구 방면으로 철수케 하였다. 본대가 빠져나가는 것을 일본군은 눈치채지 못했다. 산기슭로 은밀히 빠져나가는 데다 멀리서 바라봤을 때 나무인지 사람인지 겹겹이 중첩되는 검은 그림자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거기에다 기관총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총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후위대의 화력시위는 맹렬했다.

적들은 여전히 북로군정서가 진지를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본대가 빠져나갈 무렵 적들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아군이 철수했음을 알았다면 달빛에 의지하여 더욱 강하게 밀어 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론은 몰랐다는 이야기다. 적들이 빠지기 시작하자 아군의 후위대도 철수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7시가 넘어선 시간에 교전은 종료되고 아군은 모두 장인강 상류지대로 이동했다. 일본군은 하루 종일 공격과 후퇴명령을 반복했던 연대장 가노우 마저 전사자로 남겨둔 채 결국 어랑촌 너머로 퇴각하고 말았다. 사방이 모두 어둠이 내리자 산발적인 총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비로소 김좌진은 후위대까지 병력철수를 명령했다. 그나마 한두 발 들리던 총소리도 잦아들고 신음소리와 군장 챙기는 소리만 낮게 깔리고 있었다.

어랑촌의 사위는 완전히 어둠에 갇혔고 부상병들의 신음소리만 가득했다. 마을의 어느 한집에도 호롱불 하나 켜는 집이 없었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진동하는 874고지 일대에 남아 있는 1,000여구가 넘는 일본군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랑촌 전투는 막을 내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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