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6)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

어랑촌 전투는 일반적으로 ‘북로군정서가 고전을 하고 있을 때 홍범도부대가 배후에 나타나 후방공격을 해 줌으로 일몰시에는 일본군이 물러나고 아군도 철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임정 군무부의 기록이나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 이범석의 ‘우둥불’ 등 당시의 참전자 기록에는 홍범도부대의 참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심지어 이범석의 경우 지청천은 물론 홍범도와도 연합작전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 북로군정서가 송림평 일대에 부대를 전개한 것은 홍범도, 안무, 최진동 등이 북로군정서를 주방어부대로 하고 홍범도부대가 터시고우 방면, 의군부가 무산간도 방면의 버들고개를 점령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자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다음날 보니 모두 철수해버리고 ‘한민단’(韓民團) 1개 중대만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용상 오해가 있었겠지만, 이를테면 묘령회의에서 피전책으로 합의가 되자 그에 따라 각자의 부대를 인솔하여 떠났다거나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점을 감안 하더라도 이범석이나 김훈, 심지어 임정의 군무부까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명증한 참전 기록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한편, 신용하의 ‘독립군의 청산리독립전쟁의 연구’에서 홍범도부대가 어랑촌 전투에 참가했다고 논증한 내용이 대표적인 ‘연합작전설’인데 그러나 그 신용하가 전거로 제시한 자료는 홍범도부대가 단독으로 치른 ‘완류구전투’내용을 잘못 인용한 것이었다. 완류구전투 역시 10월 22일 아침에 약 3~4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였으며 장소도 어랑촌 일대라고 할 수 있는 남완류구 ‘불명’ 고지에서였다. 필자가 불명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지점을 적시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비정하거나 추정할 따름이다. 일본군의 기록도 이 전투장소를 ‘어랑촌 일대’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해서 이 전투와 북로군정서의 어랑촌 전투와 혼돈할 수 있다.

홍범도 장군. 손녀 예카테리나, 부인 이인복 여사.
홍범도 장군. 손녀 예카테리나, 부인 이인복 여사.

한편 홍범도의 회고록인 ‘일지’에는 어랑촌전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물론 ‘어랑촌’이나 ‘874고지’, ‘북로군정서’와 같은 단어가 보이지는 않지만 정황상 확실해 보이는 내용이다. 그리고 1920년 10월 26일자 일본군의 기록 ‘조선군 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내는 전보, 조특 제115호’의 내용에 ‘초적단’(草賊團)이 있었다는 내용에 근거하여 이 초적단을 홍범도부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아즈마지대의 예비대로 투도구에 있던 부대(보병 3개중대, 기관총 2개소대)는 봉밀구부근에 적의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시 후처창구(봉밀구 서북 약 8리) 방면으로부터 한창 귀환도중에 있는 기병연대의 주력과 합하여 22일 아침부터 어랑촌 서쪽 산중에서 적들과 충돌하여 오후 7시까지 전투를 계속하여 드디어 이를 밀림 중에서 격퇴하였다. (중략) 적은 김좌진의 부하 2~300명, ‘초적단’ 7~800명 도합 1,000명으로서 아직 봉밀구 서북 산지에 있는 것 같으므로 본월 25일을 기하여 다시 이를 포위 소탕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김좌진 부대를 2~300명이라 기술한 것부터 살펴보자. 일본군은 북로군정서와 벌써 두 번이나 싸웠다. 그런데 그때 마다 승리를 거두고 북로군정서의 패잔병이 도주했다라고 허위보고를 했었다. 그리고 북로군정서의 병력규모를 동불사에서부터 600명 정도라고 보고해 왔다. 그렇다면 그 숫자에 맞추자면 2~300명 정도만 남은 패잔병이라고 해야 된다. 헌데 그 2~300명을 잡자고 5,000여명의 보병·기병·포병부대에다가 항공지원까지 동원한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초적단이란 정체불명의 인원 800명을 끼워 넣은 것이 된다. 한편 중국 쪽 연구자들(조선족)은 공산주의 노선을 걸었던 홍범도에게 대단히 우호적인 경향이 많은데 이 구절을 거의 자구대로 받아들여 놓고 논리를 전개한다. 다음부분을 좀 더 살펴보자.

일본군들은 그날(10월 22일) 11시까지 완류구에서 홍범도부대와 싸웠다. 1920년 10월 23일자 간도총영사대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보 제 368호 ‘아즈마가 인솔한 부대의 상황’에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어랑촌 부근에서 우리 군대를 공격한 적도는 홍범도 등의 군대다. 10월 22일 오전 11시부터 남방으로 퇴각을 시작하여 토벌대는 이를 즉시 추격했으나 적은 삼림지대로 도망쳐 그림자를 감추어 버렸다.”

이렇게 북로군정서가 2시간여정도 전투를 치르고 있는 그 시각에 홍범도 부대는 완류구에서 빠져 나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정확하게 ‘홍범도’ 부대라고 적시하고 있다. 일본군의 정보능력으로 미루어볼 때 2시간 전까지 싸운 홍범도부대를 모를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정체불명의 초적단은 도대체 누가 지휘하는 부대였을까? 그리고 홍범도부대의 규모 역시 800명이 안 된다. 홍범도부대는 연합부대 이지만 최초 병력이 400명 남짓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렇다. 일본군이 싸운 독립군의 규모가 1,000명 정도이며 홍범도부대가 어랑촌전투에 참전했다는 추론 하에 판단해 보면 원래 북로군정서 병력이 6~700명 정도 되었고 후에 홍범도부대 3~400명이 합류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다음은 정말 홍범도부대가 참전했느냐하는 문제다. 홍범도의 회고록 ‘일지’에는 알고 찾아간 것이 아니라 북로군정서와 합류하기 위해 갑산촌 부근으로 이동을 하다가 경계병이 일본군 대부대가 집결하여 교전 중인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공격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을 발견한 것은 소총 사거리 밖의 원거리에서 발견한 듯 하다. 가까이에서 발견했다면 한창 교전중인 전장소음을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북로군정서와 일본군이 교전 중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고 다른 사면에 병력을 전개시키고 아끼던 기관총소사까지 감행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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