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7)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홍범도부대가 전투를 치른 완류구에서 북로군정서가 전투 중이었던 874고지까지는 불과 3km이내의 거리다. 물론 지형은 대단히 험하다. 해도 4km 이내로 떨어진 거리라면 최소한 2~3시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홍범도부대가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면 오후 2시~3시 정도에는 일본군이 보이는 지역에 부대를 전개시킬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완류구전투는 약 3~4시간의 짧은 시간에 전투가 종료되었다. 피해도 경미했다. 그렇게 본다면 홍범도부대가 874고지의 맞은편 북쪽 사면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기병연대 후방내지는 우측을 공격했으리란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더욱이 홍범도의 성품으로 봐도 적이 눈앞에 있는데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홍범도의 회고록인 ‘일지’ 22면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군정서가 청산리에 있다 하니까 연합하여 고려로 나갈까 하고 찾아 가는 길에 어구의 큰 길에 나가 서자마자 보초병이 뒤물러 서면서 일병이 수천명이 당금 당진하였다 한즉 할 수 없이 고려나가 쓰자고 하던 뿔리묘트를 걸고 일병 대부대에다 내두르니 쓰러진 것이 부지기수로 자빠지는 것을 보고 도망하여 오른 길로 산폐로 들어와‥‥‥”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 있다고 하니까 한국으로 한께 이동하고자 찾아 가는 길에 길모퉁이에 들어서자 앞서 가던 전위 경계병이 일본군 수천명이 집결하였다고 연락해왔다. 그래서 한국으로 들어간 후에 사용하려고 했던 뿌리묘트 기관총을 앞세워 일본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하니 쓰러진 일본군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바로 오른쪽 방향의 산속으로 철수하여-필자주)

“‥‥‥봉미거우(봉밀구(蜂密溝)) 지나 충신장(忠信場) 앞덕이에 올라서자 청산리 들여다 보니 청산(리) 갑산(촌)어구에 일병이 수천명 모여 서서 장교놈이 군대에 여차여차 하여야 포로로 잡을 모계(謀計)를 가르치느라고 서서 공론(公論)할 때에 뿔리묘트 걸어 놓으니 막 쓰러지는 것을 보고 철(탄환)이 (떨어지고) 없어 놓지(쏘지 ) 못하고‥‥‥”

(봉밀구를 지나 충신장 앞 언덕에 올라서서 청산리 방향을 보니 청산리 갑산촌 어귀에 일본군 수천 명이 모여 있고 장교놈이 예하 부대에다가 북로군정서를 포위 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짜고 있었다. 이때 기관총을 거치하고 사격을 하니 일본군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았으나 실탄이 다하여 더 이상 사격을 못하고 철수했다.)

첫 번째 내용은 완류구 전투이며, 두 번째 내용이 어랑촌 전투에 참가한 정황이다. 인용한 ‘일지’에서도 보듯 일본군 수천 명이 집결했다면 어랑촌 전투를 이르는 말이고, 갑산어구 역시 874고지 부근이 맞는다. 이 내용으로 봤을 때 홍범도부대가 어랑촌 전투에서 도움을 준 것은 확실해 보인다. 홍범도부대는 ‘장인하’과 ‘화집구 계곡’ 사이에 고지 군을 따라 와룡으로 이동해 온 뒤 와룡의 동북쪽 고지에서 일본군을 발견한 듯하다. 와룡에서 갑산방향으로 뻗은 계곡이 봉밀하이며 갑산, 계남, 와룡으로 촌락이 이어진다. 북로군정서가 874고지 즉 어랑촌의 서쪽 고지에 진지를 편성했기 때문에 홍범도 부대는 874고지의 동북쪽 고지에 올라 일본군을 협공하기에도 적합한 위치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몰 때 까지 북로군정서와 함께 싸운 것 같지는 않다. 일본군의 측방을 공격한 후 ‘철이 없어 놓지 못’하므로 철수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결국 일본군에게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심리적 충격을 줌과 함께 진열을 흩어 놓은 효과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어랑촌 일대.
어랑촌 일대.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다. 갑자기 홍범도부대가 나타나자 전황은 전혀 일본군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으로 흘러갔다. 갑자기 나타난 부대로 말미암아 북측사면으로 포위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됨과 아울러 전열이 두 개로 쪼개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대경실색 했을 것이다. 홍범도부대는 아즈마지대 예비대 일부병력과 교전 중인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측방에 나타났으니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북쪽사면으로 우회공격을 시도하던 부대는 꼼짝없이 측방으로 방향을 돌려 응사에 급급했을 것이고, 3면으로 공격을 막아내야 했던 북로군정서는 정면에 집중할 수 있었음과 함께 북쪽으로의 퇴로가 뚫린 것이다. 이로써 북로군정서는 다시 안정을 찾아 집중방어를 할 수 있었고 전력이 약화된 일본군을 상대로 해가 저물 때 까지 버틸 수 있었다.

워낙이 치열한 격전을 치르다보니 이범석이나 김훈이 홍범도부대가 지원하고 있는지 조차 몰랐을 수는 있다. 홍범도도 일지 22면 두 번째 교전에 북로군정서가 교전 중이었다는 내용을 기술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군 장교놈이 포로로 잡으려고 공론 중’이었다는 내용만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를 포로(포위)로 잡을려고 했을까? 당연히 행간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북로군정서였던 것이다. 정황이나 기록으로 남은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홍범도부대가 점령한 지점이나 전투에 참가한 시점, 철수시간 등에 관해서 명확한 기록이 없을 뿐이지 싸우지 않았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필자의 견해로도 어랑촌 전투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100여명의 인명손실이라는 많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용전에 용전을 거듭한 결과 이룩한 청산리대첩 최대의 승리임은 확실하지만 이 승리를 위한 홍범도부대의 지원 또한 큰 힘이 되었음도 확실해 보인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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