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8)

어랑촌에서의 승리 뒤에는 위대한 투혼과 고귀한 희생이 함께 숨 쉬고 있다. 10여 시간에 걸친 하루 주간전투에서 일본군 천여 명을 궤멸시킨 이면에 북로군정서 대원들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이범석은 적군 1,000여명 사살에 아군100명이 희생되었다고 했고, 상해에서 출간된 ‘진단’(제7호, ‘200명 의사들의 피 연변에 뿌렸다’, 1920년 11월 21일)에는 아군 200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희생의 바탕위에 승리의 영광이 탄생할 수 있었다.

1921년 1월 15일자로 서일총재가 작성한 청산리대첩에 관한 ‘전투상보’(戰鬪詳報, 전투에 관한 준비~결과, 전훈까지를 기록하여 상급부대에 보고하는 서류)다.

“적의 사상자

죽은자 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기타장교이하 1,254인(적의 자상격살 500여인)

부상자 장교이하 200인

아군의 사상과 포로

사망 1인, 부상 5인, 포로 2인

아군의 전리품

기관총 4정, 소총 53자루, 기병총 31자루, 탄약 5,000발, 군도 5자루, 나팔 2개, 말안장 31부, 군용지도 4부, 손목시계 4개, 기타 피복, 모자, 라사천, 천막, 군용손수건 등속 약 간”

상기 내용은 1921년 2월 25일자 독립신문 95호 3면에 ‘대한군정서보고’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이다. 이 시기라면 북로군정서가 북만주 겨울 혹한을 뚫고 흑룡강성 밀산에 도착하여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성을 하던 무렵이다. 그러니까 서일과 김좌진은 결별한 것이 아니고 조직의 보존을 위해 흩어져 행동했다는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김좌진이 서일에게 그동안의 일을 보고했을 것이고 참모들과 전투상보도 정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규군답게 상해로 이 전투상보를 보고했던 것이다. 이 전투상보를 지니고 상해까지 간 인물이 바로 김훈이다. 아무튼, 아군 사망 등이 이범석이나 임정 종군요원들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으나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승의 원인을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874고지의 남측 자락인 554고지 일대.
874고지의 남측 자락인 554고지 일대.

“아군은 먼저 양호한 진지를 점거하고 겸하여 3시간여의 노력한 전투로서 만일의 유산이 없이 선재의 유리함을 취하였으므로 적은 전력을 일으켜 보병으로는 우리 정면을 견제하며 기병으로는 우리의 측면 배후를 협박하고 포병으로는 지원사격을 시도하여 백방으로 승리를 도모하였으나 마침내 아무 효과가 없었나이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도 독립군이 일본군 가노우연대장을 비롯하여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병사 도합 800여명을 살상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상은 전과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어랑촌전투를 청산리대첩의 꽃이라 말한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숱한 투사들의 용전과 희생이 있었다. 몇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기관총 소대장 최인걸은 연해주가 고향이다. 그러함에도 북로군정서를 제 발로 찾아 온 사람이었다. 당시 기관총은 무게와 탄약 때문에 별도의 말이 끄는 마차에 싣고 다녔다. 덩치가 크고, 고정시킨 상태에서 사격을 하다 보니 기관총부대의 피해가 컸다. 적의 집중사격의 표적이 되었고 사격수의 절반이 전사하고 말도 쓰러졌다. 그러자 최인걸은 밧줄로 기관총을 몸에 묶고 최후의 순간까지 장열하게 싸웠다.

강화린 중대와 이운강이 지휘하던 중대의 소대원 일부가 소대장이 전사하자 진지 변환도중 산에서 길을 잃고 고립되었다. 이때 이들에게 김훈중대까지 철수로를 알려줄 전령이 필요했다. 그러나 노출된 산 사면을 이동하지면 적의 집중사격에 살아남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때 선뜻 나선이가 천수평에서 수류탄으로 고구마굴에 숨은 일본군을 몰살시킨 김홍렬이 나섰다. 그는 총상을 입고, 돌맹이와 나뭇가지에 온몸에 상처가 나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병력 5·60명을 구해내는데 성공했다.

김상하는 병사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적의 총알에 아래턱이 깨지고 왼쪽 뺨이 찢어졌다. 그런 상태에서도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육박전으로 일본군을 물리쳤다. 김훈이 철수하라고 명령을 해도 끝까지 적에게 수류탄 세례를 퍼부었고, 전사한 동료의 수류탄까지 던진 뒤 제일 마지막으로 철수한 병사다. 그리고 측방 접근로를 담당하던 1개소대 40명은 몰려오는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전원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누차 하는 언급하지만 전장상황에 낭만은 없다. 김좌진의 목은 쉬어 갈라 터져 있었을 것이고 이 진지 저진지를 뛰어 다니느라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을 것이다. 이범석의 회고에는 적탄에 김좌진의 군모가 날아가는 천우신조도 겪었고 이범석의 군도가 부러졌다고 했다. 59세의 노장 참모장 나중소까지 진지를 지켰다. 그 시절 59세면 환갑노인 행세를 할 나이다. 어른입네, 사령관입네 그렇게 어깨에 힘만 들어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에 이룰 수 있었던 금자탑이었다. 적이지만 후방에서 쌍안경으로 관망하며 지휘만 해도 될 가노우가 얼마나 답답하고 다급했으면 직접 사정거리 안까지 와서 독려를 하다 전사를 했겠는가? 가노우 입장도 이해가 된다. 어차피 패전의 책임을 질 바에야 죽는 것이 차라리 편했으리라.

어랑촌전투에서 전사한 우리 선배영령들의 투혼에 옷깃을 여몄다. 사실은 이 장소에서 후배 배성훈 박사와 우리 민속주 한잔을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배박사와 동행했던 1차 답사에서 중국당국의 난색으로 화룡지역 답사가 보류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2차 답사에서 겨우 나 혼자 애도를 표했다. 북로군정서 대원들이 목숨을 바친 어랑촌은 지금 중국영토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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