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59)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어랑촌에서 철수한 북로군정서는 ‘만기구’(萬麒沟)방향으로 이동한 후 산중에서 야영을 하였다.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도양차’방향으로 ‘화집구’(華集沟)를 따라 가다가 ‘중향’(中鄕)부근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이수구하’(梨水溝河) 옆의 산록이거나 혹은 ‘충청구산동’(忠靑溝山洞) 쯤에서 숙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대략 4시간 정도 행군은 했다고 보이며 달도 저물어 가는 시간이다. 늦가을 찬바람은 이미 겨울이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20일 밤 백운평골짝으로 이동한 이후 사흘 밤낮을 자지 못한 북로군정서의 피로도는 극에 달한 상태였을 것이다. 거기에다 계속 뛰다시피 이동과 전투를 연속적으로 치른 데다 모두가 크고 작은 상처 하나쯤은 몸에 지니고 있는 터, 되는대로 뒤집어쓰고 낙엽을 덮기도 하며 곯아 떨어졌을 것이다. 김좌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주야를 뜬 눈으로 새우신 김좌진 장군은 지친 몸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지금 내 곁에서 코를 골고 주무신다.” 이범석은 달빛아래에서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하여 핼쭉해진 얼굴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김훈의 회고다.

“어랑촌 싸움에서 대승을 박(博)한 후 그날 밤은 만록구(萬鹿溝) 삼림중에서 노영하고 이튿날 즉, 22일(23일이 맞는다) 아침에 우리의 대부대는 0령 방면을 향해 출발하였나이다.

그중에서 수부대는 분로(分路)하야 동일 오후 3시경 서맹개골 삼림중으로 통과할 때에 기병 30명이 본 골짜기의 가도(街道)로 진입 하였나이다.

아군은 곧 림연(林沿)에 잠복하였다가 일제히 사격을 행하니 적 10여명은 즉사하고 그 나머지는 패주(패주)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득한 전리품은 생마가 5필, 군용지도 4장, 시계 5개와 기타 피복 장구(裝具) 등 물이었나이다.“

추위에 떨면서도 그래도 단잠을 잔 북로군정서는 ‘0령’ 쪽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여기에서 북로군정서는 몇 개의 부대는 분로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부대를 분산해서 이동을 시켰다는 말이다. 기상하여 출발할 때까지는 ‘대부대’였는데 출발하면서는 분산이동을 한 이유는 이동로의 제한 때문이었다. 골짜기 외길로 긴 행군 장경을 유지하며 정상적인 행군대열을 유지할 경우 적의 기습이나 매복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를 보면 북로군정서 조직은 지역의 지형을 훤히 뚫고 있었다. 각 제대에는 북만주일대 도처에서 모인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있었고 이들은 그 지역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었다. 김좌진은 단순히 지도에 의존해서 부대 이동을 시킨 것이 아니고 실재의 상황과 상태를 먼저 파악한 후 계획을 수립하고 명령을 내렸다. 이 덕분에 ‘맹개골’전투로 불리는 매복전도 승리한다.

분진한 병력은 ‘0령’방향으로 가다가 만기구 부근에서 다시 집결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소규모 매복전이 맹개골 전투다. 맹개골은 ‘맹가구’(孟家沟)를 김훈이 잘못 알았거나 토속발음의 표기다. 맹가구는 지금의 ‘맹산골’(孟山沟)을 가르킨다. 맹가구는 장인강 지류인 맹산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장인촌 북쪽으로 장인강을 거슬러 2km가량 거슬러 올라가면 서쪽으로부터 ‘맹산하’(孟山河, 대협피구라고도 함)가 흘러나오는데 이 맹산하가 장인강과 합수되는 곳에서 맹산하를 거슬러 5km쯤 더 올라가면 이르는 곳이 맹가구다. 합수목으로부터 10리 정도에 이르는 지역을 ‘대협피구’(大夾皮沟, 따쟈피꺼우)라 하며 그 서쪽을 맹산골이라 부른다.

맹산하와 장인강의 합수목인 대협피구에 들어서서 서쪽으로 향하면 여러 갈래의 골짜기들이 남북으로 뻗었는데 북으로 뻗은 ‘오봉산(五峯山)골’, 남으로 뻗은 ‘신광전사(新光田舍)골’, ‘진란전사구’(鎭蘭田舍沟), ‘우방태(禹房太)골’과 북으로 뻗은 ‘양가구’(楊家沟)를 지나면 ‘맹산’이라 부르는 마을자리가 있다.

이 맹산은 평안남도 북동부에 있는 ‘맹산군’사람들이 이주하여 만든 마을이어서 붙여졌다는 말도 있고 맹가구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맹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제일 먼저 들어와 정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인가가 없다. 해서 이 맹가구의 어느 지점이 전투장소였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0령’이라고 표시된 고갯길이 어디냐가 관건이 된다. 인쇄원문에서부터 정확하게 기록하질 않았다. 일부에서는 이 글자를 ‘회’자로 읽어 북한의 ‘회령’방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필자가 보건데 전혀 아니다. 회령은 남쪽이고 북로군정서는 북쪽으로 향했다. 따라서 이 고개는 ‘황구령’(黃溝嶺)으로 보인다.

황구령은 맹산에서 서북쪽으로 10km정도 떨어진 두도하자하 끝자락에 있다. 따라서 북로군정서의 이동로 상 천보산 방향으로 보면 이 지역에 있는 고개는 황구령 뿐이다. 그렇다면 서맹가구는 어디일까? 맹산마을 자리에서 서쪽으로 1.5km정도 되는 계곡을 가르킨다. 이 길에는 변변한 도로가 없다. 골짜기 외길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다.

어랑촌과 홍범도 부대가 협공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고지. 
어랑촌과 홍범도 부대가 협공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고지. 

김훈도 이 길을 따라 이동 중에 적을 만난 것이다. 적은 기병이었다. 그런데 아군은 전위를 두었는지 아니면 전방 상황을 철저히 주시하며 걸었는 지는 모르지만 적은 아군을 발견하지 못했고 아군은 적을 발견했다. 이때가 오후 3시경이었다. 그렇다면 적은 해를 안고 있었고 북로군정서는 해를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방을 감시하는 데는 아군이 훨씬 유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술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제일 크다. 이때까지는 북로군정서는 분산 이동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골짝 이동로를 이용한 것이 김훈이 포함된 분진이었다. 이범석의 우둥불에는 이 작전이 기술되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 다른 루터로 이동했음으로 보인다.

일본군 기병을 발견한 아군은 길 양쪽 산속으로 신속하게 몸을 숨겼다. 길옆 산등성으로 올라 간 북로군정서는 적이 다기오길 기다렸다가 적이 화망 속으로 들어오자 일제히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벌어 진 일이다. 매복에 걸린 일본군은 앞쪽의 병사 10여명이 고꾸러지는 걸보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일본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북로군정서는 말을 포함한 전리품을 챙겨 다시 만기구 방향으로 이동을 계속했다. 이때 이 대열은 김좌진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몇 개로 나눈 북로군정서의 제대들 중 김좌진이 지휘하는 제대에서 벌어 진 전투였다는 것이다. 맹가구 전투뿐 아니라 만기구, 시구 전투 모두가 그랬으며 천보산은 김좌진과는 무관하게 이범석이 김훈과 같이 치룬 전투다.

적들이 이 지역을 소규모로 혹은, 중대 단위로 계속 다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날이 밝자 북로군정서를 찾기 위해 내 보낸 정찰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추격대라면 북로군정서 전체의 규모로 봤을 때 교전하기 힘들다. 전원 몰살을 각오해야 된다. 뿐만 아니라 후속 본대가 오기도 전에 궤멸될 것이 뻔하다. 아니면 북로군정서도 소규모로 패잔병처럼 지리멸렬해 있을 거라고 오판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수병력으로 수색과 정찰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북로군정서의 흔적을 찾은 다음 다시 한 번 대규모 토벌전을 벌이기 위해 내보낸 병력으로 보인다. 김좌진은 전리품을 수습한 후 신속하게 그 곳을 빠져 나갔다. 다행히 다른 제대에서는 적과 조우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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