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60)

[팩트인뉴스=김종해 기자]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팩트인뉴스=김종해 기자]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전쟁 중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아군이나 적군이 모두 사선을 넘나드는 상황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만기구’(萬麒沟)전투가 딱 그런 경우다.

김좌진은 맹가구 전투에서 적의 기병정찰대를 물리친 후 20리 정도를 이동시켜 만기구 부근에 이르러 휴식하게 했다. 이는 김훈의 기억이다. 그러나 실제는 맹가구(맹산)에서 만기구까지는 6km정도 떨어져 있다. 산길로 행군하다 보면 그리 느낄 수는 있다. 그리고 만기구 부근 삼림지역이라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지점까지는 확인하기 힘들다. 대략 만기구 부근 이라고 알 수밖에 없다. 만기구로 이동할 때는 말 5필을 전리품으로 챙긴 후라 말이 이동할 수 있는 소로를 택하여 이동했을 것이다. 산길로 6km정도라면 두어 시간 행군을 했다는 말이다. 집결지를 두고 시간계산을 해 봤을 때 그쯤이면 휴식을 취해도 괜찮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바로그때, 한 무리의 일본군 보병부대가 나타났다. 김훈이 말한 당시의 상황이다.

“맹개골전장에서 전리품을 수습한 후 만록구(맹개골서 20리) 후방 삼림에서 휴식할 때에 전방 약 100m의 처(處)에서 적의 보병 50명이 밀집으로 서서히 래하였나이다.

김좌진씨는 이를 보고 피아를 불지(不知)하야 큰 소리로써 “그 아군인가” 문(問)하매 적은 이를 듣고 산개(散開)하려 하는 고로 그제야 적인 줄 알고 수백발의 급사격을 행하였나이다.

적병 30명은 즉사하고 그 외에는 탈주하더니 좀 후에 200여명이 대거하야 약진하였는데 아군은 이를 피하고 후방 삼림으로 퇴각하야 숙영하였나이다.”

김훈은 이 지점을 ‘만록구’(萬鹿溝)라고 했지만 ‘만기구’(萬麒溝)가 맞는다. 독립신문에서 오자를 냈는지 김훈이 혼동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만록구라는 지명은 그때도 지금도 없으며 만기구는 있다. 기린 ‘기’(麒)자에서 기(其)자를 탈락시킨 채, 사슴 ‘록’(鹿)자만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일본군 입장에서는 황당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분명 대협피구와 은재동구 사이 어디엔가 북로군정서군이 이동하고 있을 터인데 이를 확인하라고 내 보낸 정찰·수색대가 오히려 역 매복이나 역 수색에 걸려 번번이 당하고만 있으니 속된 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경우에도 북로군정서는 쉬어도 사주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후방으로 경계병을 내 보내고 측방으로 적이 기습할 수 있는 곳인지 확인한 후에 휴식을 주는 것이 원칙이다. 휴식을 취하더라도 삼림 중으로 흩어져 휴식하면서 자신의 몸은 최대한 감추는 것 또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북로군정서가 훈련이 잘된 정예군이라는 이유가 여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리 피곤한 상태여도 그런 전술행동 만큼은 철저히 준수했던 것이다.

반면 일본군들은 지역 내에 북로군정서군이 이동 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수색과 정찰을 했음에도 기본적 원칙조차 지키지 않았다. 50여명의 병력이 수색·정찰을 하면서도 ‘무리’지어 다닌 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틀림없이 적들은 이동 간에 개인화기를 지니고 있을 때도 즉시 사격이 가능한 자세가 아니라 어깨에 걸머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웅성대며 이야기도 나누고 군기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으로 이동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북로군정서인줄 알고도 즉각 사격을 할 수 없었다.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전술적 행동을 했더라면 소리 나는 방향으로 바로 사격부터 하면서 몸을 감추었을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최초 일본군이 나타났을 때 북로군정서도 일본군인지 아군인지 구분을 못했다는 사실이다. 전초로 내 보낸 경계병으로부터 전방에 50여명의 군인무리가 출몰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김좌진이 직접 확인에 나서고 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느냐 하면 당시 북로군정서의 복장이 일본군과 비슷했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시간 다른 제대 –이범석, 나중소 등이 지휘하여 다음 집결지로 이동 중이었다- 역시 부근에서 이동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았던 것이다.

일본군을 향해 걸쭉한 충청도 억양으로 “그 아군인가?”라고 소리치는 김좌진을 상상해 보라. 그 소리를 들은 일본군들의 당혹스러운 모습 또한 실소를 지울 수가 없는 장면 아닌가? 한국말로 물어 보는 김좌진을 보고 놀란 일본군이 즉각 사격을 했더라면 김좌진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었다. 물론 병력들은 모두 몸을 숨기고 순식간에 적을 향해 사격준비를 마친 상황이었고 김좌진도 은폐물 뒤에서 소리쳤겠지만 소리 나는 쪽으로 총구는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본군은 황급히 몸을 숨기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군은 북로군정서군의 화망(火網) 안에 갇힌 뒤였다. 순식간에 3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데 뒤이어 200명이 바로 ‘약진하여’ 왔다고 했다. 김좌진은 30명을 절멸하고도 현장에서 전리품 수습이나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반드시 주위에 또 다른 적이 있음을 알았다는 말이다. 보병부대는 50명 단위가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본대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자리에서 대기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바로 이어서 200여명이라는 대규모 부대가 전개해 왔다. 만기구에 무리지어 나타난 일본군 50여명과 바로 약진 접근했던 200명은 어떤 관계일까? 일제는 이런 소규모 피해에 대해서는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즈마지대의 병력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50명은 200명에 앞서서 보낸 전위이거나 아니면 250명가량이 나누어 그 일대를 수색·정찰하고 있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250명이 나누어 있었다기보다 본대로 봄이 타당한 것 같다. 만약 흩어져서 정찰이나 수색 중이었다면 그렇게 빨리 집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좀 전에 당했던 부대와는 다르게 전술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는 은폐물이나 엄폐물을 이용하여 엄호를 해 가면서 이동을 했다는 말이다. 북로군정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30여명이 순식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신중하게 전술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이런 행동까지 북로군정서는 다 보고 있었다. 적들이 전술적 대형을 갖추고 전개한 가운데 접근한다면 당시 김좌진이 인솔하던 제대의 규모로 정면 싸움을 한다는 것은 무리다. 이 병력들을 무사히 집결지까지 인솔해야 된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은밀히 철수해 버린 것이다. 적들은 다시 한 번 북로군정서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것이 만기구전투의 실제 모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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