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61)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만기구 삼림에서 마주친 적을 순식간에 격퇴하고 후방 산림으로 철수한 김좌진은 산중에서 다시 1박을 하였다. 그리고 10월 24일 날이 밝자 맹산하를 따라 서북방향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가 ‘서구’(西沟)전투다. 서구는 우리 동포들의 호칭으로는 ‘서골’로 불리며 맹가구에서 10리 정도 떨어 져 있다. 그러니까 장인하의 지류부근에서 산과 계곡을 넘으며 은밀하게 조금씩 이동을 해 갔다는 말이 된다. 북로군정서의 한 개 제대이긴 하지만 이 서골 전투가 정규군이 맞붙은 마지막 전투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전투를 ‘쉬구전투’ 혹은 ‘쉬골전투’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맹가구 서구전투’(孟家溝 西溝戰鬪)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다. 이 교전을 김훈이 ‘북로아군실전기’에 ‘쉬구’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내연구자들이 이 지역에 대한 답사나 지역조사를 하지 않고 그냥 북로아군실전기를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김훈이 ‘쉬구’라 한 것은 ‘서구’를 중국어로 발음하면 ‘씨커우’가 되기 때문에 기억을 더듬어 쉬구로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전투 장소는 불명확하나 대략 서골로 이동 중에 일어 난 교전이며, 김훈은 마을을 바라보고 싸운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 마을 상단 고지에서 하단부를 바라보며 싸웠다고 판단된다.

맹가구 서골(西沟)은 맹산하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다. 만기구에서 계속 계곡을 따라 오르면 ‘북구’(北)沟, ‘하남구’(下南沟), ‘상남구(上南沟)’를 지나 ‘서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마을이 없는 무인지대이며 임장소속의 산림지대다. 지금의 맹산북동(맹가구)에서 서골 끝자락 까지는 4km남짓인데 여기에서 북쪽으로 산을 넘어 6~7km 정도 더 가면 두도하자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2,5km 정도 더 가면 해발 917.9m 황구령(黃沟領)이다.

그렇게 가지 않고 서골에서 바로 서쪽 산을 타면 4km정도 가면 안도현의 ‘대황구’(大荒沟) 자락에 도착 할 수도 있다. 어랑촌 전투 후 홍범도부대가 이동해 간 곳이다. 그리고 대황구에서 서북으로 향하면 ‘고동하’(古洞河) 본류에 닿는다. 역시 홍범도부대가 10월 26일 일본군과 마지막 교전을 치른 곳이다. 고동하는 안도현을 관통하여 ‘양강진’(兩江鎭)에서 ‘이도백하’(二道白河)와 만나 송화강으로 한 몸이 되는 하천이다. 이도백하는 잘 알다시피 백두산 천지에서 달문을 지나 비룡폭포로 떨어지는, 백두산 정수리가 직접 토해내는 유일한 물길이다.

천보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의 서북쪽은 고동하가 흐르는 안도의 대황구 지역이며 동남방향은 장인강이 흐르는 화룡 방향이다. 곧 북로군정서가 싸웠던 장소는 모두 천보산의 서남에 위치한 능선과 계곡들 즉 ‘해란하’, ‘봉밀하’, ‘연집하’, ‘장인하’의 계곡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북로군정서의 전적지는 현재의 화룡현에 몰려 있다.

맹산북동에서 서골에 들어서면 650~850m에 이르는 고지들이 둘러싸여 있고 전투는 골짜기의 끝자락에서 벌어졌다. 이 지역은 해란강으로 합수되는 장인강의 제일 상류쪽 지역이다. 이 전투는 장인강 계곡의 마지막 자락 즉 산등성이 부근으로 이동하며 적을 발견하고 치른 전투였다. 김훈의 기록을 보자.

“전날 밤 삼림 속에서 숙영한 후 23일 쉬골로 향할 때에 적의 기포(騎砲) 6문과 보병 100여명이 방심하고 촌락의 전방을 통하야 아군이 있는 삼림 중으로 서서히 올라오더이다.

아군 50명은 이에 향아여 사격을 맹렬히 행하매 포병이 섬진(殲盡)되는 동시에 후방에 따라오던 보병들은 곧 퇴각하였나이다.

마참 이사람의 좌편으로 적의 기병 한 개 소대가 래하야 말은 촌락에 매고 산개하야 삼림 중으로 올라오는 고로 아군은 이를 마주하야 약 20분간 사격을 하다가 기갈이 막심하야 그만 중지하고 퇴각하였나이다.”

기포병(騎砲兵)은 말이 견인하는 포병을 말한다. 중포는 아니다. 그래도 이런 근접전이나 산악전투에서는 이동이 편리하고 소형이어서 중포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이 부대는 고지에 위치하여 주위에서 북로군정서군이 나타나면 바로 화력전을 할 수 있도록 이동시킨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천보산 일대에 배치된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그 전날 북로군정서와 싸웠던 부대일 수도 있다. 만약 그 부대라면 북로군정서가 그 지역에서 아직 이동 중이거나 은거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감제고지를 점령하여 역시 화력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보병으로 소탕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마저도 먼저 그 지역에 이동해 있던 북로군정서에게 들키고 만다. 여기서도 일본군은 ‘방심하고’ 올라왔다. 앞에 북로군정서가 이미 조준상태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올라왔다. 그리고 기병도 좌측으로 동시에 올라왔다는 것으로 보면 마을 부근에 있었거나 약간 떨어진 상태로 같이 편조를 이루어 후위에서 이동한 부대였던 것 같다.

북로군정서의 이동은 일본군에게 전혀 노출된 흔적이 없다. 대신 일본군은 항상 노출된 상태에서 대패하곤 한다. 이는 게릴라전에 있어서 일본군이 북로군정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기포 6문을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6문을 끌던 포병이 제압 당하자 혼비백산 일본군 보병은 다시 도망치기 급급했고 총알이 날아 온 방향으로 우회하여 접근하던 기병들도 말을 메어 놓고 접근해 봤지만 이도 김훈의 부대에게 집중사격을 받고 묶여 버린다. 그리고 이때도 일본군은 북로군정서의 위치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에게 패퇴한 것이 아니라 목마르고 배가 고파 싸움을 그만두고 일방적으로 철수해 버린 것이다.

목이 마르고 배가고파 더 이상 싸움을 포기하고 철수해야하는 그 참담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6전 6승, 그것도 병력과 장비의 절대열세를 딛고 일방적인 승리로 이끈 청산리대첩의 마지막 전투는 허기와 갈증으로 종료된다. 어쩌면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고, 일제가 동시에 진행한 동포사회에 대한 초토작전의 반사효과 일수도 있다.

북로군정서가 서일 등의 지시에 의해 북쪽으로 이동을 했는지 김좌진이 밀영을 만들기 위한해 이동을 했는지는 어디에도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김좌진과 홍범도가 대황구에서 회합을 가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봐서 이때 이미 밀산으로의 이동이 합의된 사안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서일이 먼저 이동해 있었고 일군의 독립군부대도 이미 흑룡강 지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연변일대에서 밀영을 설치한다거나 계속 항쟁을 지속하기에는 한국인 동포사회의 피해가 너무 커질 우려가 있고 지원도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북만주의 겨울은 혹독하다. 풍찬노숙을 감내해야하는 북로군정서대원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은 일본군만이 아니었다. 눈보라와 삭풍을 뚫고 동북방향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 앞에는 새로운 시작의 희망에 앞서 추위와 허기의 현실을 먼저 뚫어야 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김좌진의 새로운 고민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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