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62)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바람의 기록'이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2021년 12월1일 부터 10개월여간 64회에 걸쳐 게재했다.

'바람의 기록'은 '독립전쟁 청산리대첩' 주력부대인 북로군정서의 이동 경로를 국내 처음으로 직접 답사한 뒤 출간한 역사기록물이다. 그동안 김좌진에 대한 평정, 연구논문, 각종 발표문, 일제의 자료 등은 부분적인 답사기록에 근거하는 한계가 있었다. 청산리 대첩을 앞둔 북로군정서의 전 동선을 총정리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필자인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이 청산리대첩 시작전 부터 전투 전 과정의 행적을 쫓고 흔적을 찾아 정리한 사료집이어서 평가받고 의미를 더했다.   

북로군정서 청산리전투 과정 이동경로.

김 관장은 예비역 대령출신으로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정치학 박사다. 김좌진의 주 활동지역이었던  북만주 하이린(海林)에 위치한 한국우의공원 관장으로 10여년째 봉사하고 있다. 김 관장 이력에서 엿볼 수 있 듯 군 전술에 대한 이해와 전문지식은 어느 자료에도 발견되지 않은 북로군정서의 끊긴 흔적을 역사속에서 찾기에 충분했다. 

'바람의 기록'은  1920년 11월말까지 김좌진과 북로군정서 활동을 담고 있다. 김좌진이 순국한 1930년 1월24일까지 행적을 사실에 근거해 정리한 구체적인 사료집은 아직 없다. 따라서 '바람의 기록'  게재 끝은 또다른 형태의, '제2 바람의 기록'의 출발이라고 말하고 싶다.<편집자 글>  

청산리전투 승전 기념 사진. 김좌진 총 사령관이 맨 앞줄 가운데 앉아있다.
청산리전투 승전 기념 사진. 김좌진 총 사령관이 맨 앞줄 가운데 앉아있다.

‘청산리대첩’이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한 이는 필자의 지식으로는 철기 이범석이다. 광복군 참모장시절인 1941년 중국에서 ‘한국의 분노’(韓國的憤怒)라는 백화문 책을 출판하여 ‘청산리 전투’를 ‘대첩’이라고 성격을 규정하고 우리 동포사회는 물론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린 바 있다. 함에도 우리사회에 한 때는 ‘청산리전투’로만 알려져 있었고 이 마저도 청산리마을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일종의 무용담 정도로 다루어졌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애국동지원호회’에서 문화국장 ‘홍주’(洪疇)가 집필한 ‘백야실사’를 통해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전투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인쇄본 보급이 안 되면서 거의 신화적 무용담 차원에서 다루어지기 일 수였다. 청산리대첩은 이순신 장군 사후 일본군 정규군을 우리 정규군이 물리친 최초의 독립전쟁이었고 을사의진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길고긴 독립전쟁의 한 장을 찬란하게 장식한 대첩이었다.

 

홍주는 청산리대첩의 승인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길 수 있었겠는가? 끊임없는 산령 속에서 전쟁을 한 때문이며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용감한 청년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 보담도 우리에게는 망국 십여 년의 대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임정에 보고한 ‘전투상보’를 통하여 아군의 승리와 일본군의 패인을 분석해 놓았다.

“이번 전투에 백반의 승산을 유인한 적은 하로 인하여 반히 대패를 초하였으며, 백반을 준비가 부족한 아군은 능히 승전을 득하였는지 차를 약진함.

-적의 실패이유

①병가에서 제일 꺼리는 것이 경적행위(輕敵行爲)인데 험곡장림(險谷長林)을 별로 수색도 없이 경계도 없이 맹진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을 당함이며

②국지전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 중에서 종종 자상(自相) 충돌을 당함이며

③그들 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逃生)하는 겁나심은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사법(射法)이 부정하여 1발의 효과도 없는 난사를 행할 뿐이더라

-아군의 전승이유

①생명을 불구하고 분용(奮勇) 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 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를 압도 함이요

②양호한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한 준비로서 사격성능을 극도 발휘함이요

③응기수변(應機手變)의 전술과 예민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를 출함이라.“

참으로 다 맞는 말이다. 국치를 당한지 10년, 김좌진이하 북로군정서의 누구하나 그 치욕의 세월을 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독립의 갈망을 지닐 수 있었다. 그 독립의 갈망은 살신성인의 지고한 군인정신을 지닐 수 있었고 일제에 대한 복수심으로 승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철저한 훈련과 엄정한 기율이 승인이었다면 이는 곧 그렇게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유발되어야만 가능하다. 일본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라는 결과에 한껏 고무된, 말하자면 오만함에 기초한 높은 사기를 지니고는 있었다. ‘감히 불령선인 따위가 대일본제국 황군에게 덤벼?’라는 마음가짐 같은 거 말이다. 그러나 북로군정서는 그 오만함을 철저히 짓이겨 주었다. 오만함에 앞서는 것이 원한이었고 그 원한을 갚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며 이를 악물고 훈련하고 연마했다. 그 결과가 청산리 대첩 6전 6승의 빛나는 전과였다.

청산리대첩은 전쟁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온 동포들에게 패배의식을 불식시키고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으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물려 준 정신적 뿌리역할을 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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